국숫발같은 뿌리를 가진 '갯메꽃'

내게로 다가온 꽃들(53)

등록 2004.05.17 06:26수정 2004.05.1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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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갯메꽃의 군락지에 서니 그동안 한 송이 두 송이 서너 송이씩 피어있던 것들을 담았던 정성이 무색해 질 정도입니다. 그래도 그 이전의 것들도 소중하고, 이런 쉽지 않는 광경도 고마운 것이겠지요.

'메꽃'의 꽃말은 '속박, 충성, 수줍음' 이라고 합니다. 갯메꽃은 메꽃과의 식물로 나팔꽃이나 메꽃, 애기메꽃과 비슷한 종류입니다. 그래서 나팔 형태로 피는 꽃 모양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잎의 형태, 꽃 색깔 그리고 자생지가 조금씩 다르답니다. 갯메꽃은 콩팥모양의 윤기 나는 잎으로 해안가 모래밭이나 바위틈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해안가에서 나는 메꽃'이라는 의미로 갯메꽃이라 한답니다.


김민수
나팔꽃은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만 활짝 핀 모습을 보여줍니다. 따가운 햇살이 비치면 이내 피었던 꽃을 닫아버리거든요. 그런데 메꽃은 하루종일 맑은 모습 그대로 피어있답니다. 물론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메꽃도 화들짝 피어있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메꽃은 씨앗으로도 퍼지지만 메꽃은 뿌리로 번지기 때문에 별 이상이 없는 한 한 곳에서 군락을 이루며 살아가는 점에서 나팔꽃과도 다릅니다.

메꽃이라는 이름에 '갯'자가 붙은 것은 위에서도 말씀드렸듯 해안가에서 자라나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것도 모자라 제주에서는 겨울에도 윤기 나는 푸른 잎을 간직하고 있답니다. 이 꽃을 보면서 저는 메꽃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민수
어린 시절 굶어본 경험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시절이 없었다면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을 어찌 조금이나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유 있는 고난을 허락하셨던 것이겠지요.

대학시절 자취할 적에도 부실하게 먹었습니다. 튼실하던 이도 그 때 많이 부서졌는데 작은 3kg 밀가루면 수제비에 칼국수, 빈대떡 등등 같은 재료지만 이것저것 만들어 일주일을 버티곤 했었습니다. 가끔은 겨울방학 때 친구들도 없는데 먹을 것이 떨어지면 그냥 며칠이고 굶을 때도 있었죠. 그래도 덜 슬펐어요. 정말 없어서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집에만 가면 언제든지 따스한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어느 해 겨울방학 공부를 한다고 자취방을 고집하다 먹을 것이 다 떨어진 겨울날 너무 배가 고파 밭에 묻어둔 주인집 무를 하나 훔쳐먹었죠. 그런데 빈속에 먹어서 얼마나 속이 쓰린지 한참 배를 부여잡고 뒹굴기도 했었죠.


김민수
그때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이라는 것을 똑같이 느끼지는 못했지만 대충 이런 고통이구나 하는 정도는 감히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에 이르면서 어린 시절 논두렁에서 캐먹던 메꽃의 국숫발같은 하얀 뿌리가 생각나는 겁니다. 봄이 오기 전이었고 아직 땅은 얼었을 때였으니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나무가지 같은 것으로 메꽃뿌리를 캐서 날로도 먹고, 삶아서 먹기도 했습니다.

나보다 더 가난한 집 아이였겠죠. 메꽃의 뿌리를 어찌나 잘 캐던지 감탄사가 절로 날 지경이었는데 아마도 우리집이야 밀가루로나마 세 끼를 채울 수 있었지만 그 집은 밀가루만으로도 부족한 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집에 가서는 밥 한끼를 먹어본 적이 없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우리집보다 조금 여유 있는 집은 같은 밀가루인데 수제비 일색이 아니라 제법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칼국수도 있고, 떡국처럼 썰어 만든 수제비도 있었습니다. 쫀득하니 그냥 물반죽을 해서 숟가락으로 뜬 수제비와는 격이 달랐죠. 그 씹히는 맛이라는 것이…그런저런 생각이 나는데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럽데요.

김민수
그래서 그 칼바람을 맞으며 논두렁에서 메꽃의 뿌리를 캐던 생각 때문에 울컥했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땅 어디에선가도 최소한의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이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먹는 것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습니다.

메꽃의 모양새는 나팔모양이지만 또한 옛날 시골 마을 어귀의 나무마다에 매달려있던 확성기 모양입니다. 시골마을마다 하나씩은 달려있었던 그 확성기 같은 꽃, 줄기는 땅을 기고, 타고 올라갈 것이 있으면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갑니다. 무언가 하늘에 대고 할 말이 많은 꽃 같기도 합니다. 갯메꽃이니 하늘에 파도소리라도 들려주려는 것일까요?

김민수
'애들아, 저게 갯메꽃이야. 바다 근처에 사니 '갯'자가 들어간 것인데 메꽃과 이파리 모양만 다르고 똑같단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잖아. 물론 하늘에 계셔도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지.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하나님은 메꽃을 만들어 주셨어.

"애야,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나에게 큰소리로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꽃 모양도 나팔모양으로 만들어 주었단다. 그런데 메꽃이 이 땅에 살면서 보니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너무 힘들게 살고, 잘사는 사람들은 너무 잘사는 거야. 아마 노력을 안 하니까 못사나 보다 했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도 부자들에게 빼앗겨서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하나님, 이 땅에 문제가 있어요!"

크게 소리쳤지만 하늘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어.
높은 곳으로 올라가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어.
그렇게 하루 이틀, 일년 이년.
메꽃은 하나님이 자기의 소리를 듣지 못하시는 것만 같아서 지쳤단다.

'그래, 하나님이 혹시 돌아가셨을지도 몰라. 아니면 부자 편인지도 모르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를 나누어 줄 수 있다면… 혹시라도 내 몸에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라도 있으면 나눌텐데….'

그러나 메꽃이 그렇게 하늘에 대고 하나님께 소리를 치고 있을 때, 이미 하나님은 땅에 와 계셨단다. 가난한 자들의 아우성치는 소리에 침묵할 수 없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 그러니 하늘에 대고 외치는 메꽃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거야. 메꽃은 하늘에 대고 외치는 것을 포기하고 땅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외치기 시작했어.

"배가 고프면 나의 하얀 뿌리라도 캐다가 드세요. 국숫발같이 생긴 하얀 뿌리를 쪄서 먹으면 조금이라도 나을 거예요."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메꽃의 뿌리를 캐서 먹기 시작했단다.

"햐, 신기하기도 하지. 정말 국숫발같이 하얗고 탐스럽기도 하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이 땅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하시던 하나님도 메꽃의 소리를 듣게 되었어. 그리고는 메꽃에게로 가셨지.

"정말 너를 캐먹어도 되겠니?"
"그럼요. 내 몸이 끊어지는 아픔 정도는 참을 수 있어요. 어서 제 뿌리를 먹고 힘내세요."

메꽃은 그가 떠난 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어. 왜 하늘에 그토록 이 땅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외쳤는데도 침묵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았던거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곳 고통의 소리가 있는 곳, 여기에 계셨군요.'

하나님도 메꽃의 마음에 감동이 되셨지. 그래서 아무리 뿌리를 캐가도 그 생명을 이어가라고 튼튼한 뿌리를 주셨단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메꽃의 뿌리를 캐가도 꼭 땅 속 어딘가에 그 뿌리를 남겨주셔서 지금도 여기저기에 메꽃들이 줄기차게 피어난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단다.

김민수
물론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서라도 꽃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하나 둘 만들다 보면 그게 또 꽃 이야기가 되겠죠.

언젠가 꽃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서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더니 많이 보던 글과 사진이 나옵니다. 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로 굳어갈 수도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꽃 이야기가 없는, 꽃말이 없는 꽃들은 이야기를 붙여주고 꽃말을 붙여주는 사람이 임자인 것 같아서 기분이 좋기도 했답니다.

조금은 슬픈 꽃.
민중들과 동고동락했던 꽃.
비록 메꽃은 아니고 갯메꽃이지만, 척박한 땅을 하나 더 이고 있으니 그 의미가 깊다면 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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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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