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아이들'과 '보고픈 선생님'의 만남

스승의 날, 어느 출판 기념회에 다녀와서

등록 2004.05.17 22:13수정 2004.05.1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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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풍선을 다는 효산고 아이들

풍선을 다는 효산고 아이들 ⓒ 윤지형

책 속 주인공인 제자들이
선생님을 위해 마련한 "아주 쬐끄만 모임"


부산 발 순천행 고속버스에 오르자 잔뜩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봄비.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스승의 날'에 내리는 이 비는 길을 잃은 우리 교육에 희망의 싹을 틔워 줄 단비일까? 아니면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아파하는 아이들의 눈물일 뿐일까? 내 상념과는 상관없이 고속버스는 남해 고속도로를 질주했고 나는 가방에 넣어온 책 한 권을 다시 꺼내 보았다.

제자들이 선생님을 위해 마련한 출판기념회라 했다. 새삼 가슴이 설렜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쓴 책은 아이들과 나눈 사랑과 성장의 이야기였고 나는 진작에 그 책의 원고를 읽고 발문까지 쓴 바였던 것이다.


오후 2시, 쏟아지는 비를 뚫고 순천 연향동 중앙 서점 3층의 꽤나 넓은 대회의실로 들어서자 정면 무대 쪽으로 큰 걸게 그림과 글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책과 선생님을 위한 아주 쬐끄만 모임"


여자아이 몇몇은 그림 위쪽에 풍선을 다느라 여념이 없고 40여 명의 남녀 고교생들은 떡과 음료수를 앞에 두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 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는 순천 효산고에 재직중인 시인 안준철 교사(51)가 최근 두 번째로 펴낸 교육 에세이집의 제목이고 "쬐끄만 모임"은 물론 출판 기념회를 이름이다.

안 교사가 첫 담임을 맡았던 제자 배태성(35)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의 작고 소박한 행사는 외부 인사들이 주를 이루는 여느 출판 기념회와는 달리 준비하고 참석한 사람 대부분 안 교사가 쓴 책에 등장하는 옛 제자나 작년에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이었다.

기념회를 주선한 사람은 배태성씨와 김우중(33)씨고 식장 꾸미기는 작년 반 아이들이 맡았다고 한다.


"어른들은 몇 분을 제외하고는 오시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직 제 책의 주인공들인 아이들과 함께 책의 출간을 기리고 싶었지요."

안 교사의 말이었다.


a "선생님을 소리 없이 옆에서 지켜주는 아이" 종미

"선생님을 소리 없이 옆에서 지켜주는 아이" 종미 ⓒ 윤지형

"일등도 꼴찌도 없이
함께 달리는 사람은 아름답다"


과연 그의 에세이집을 펼쳐보면 그가 아이들과 나누는 사랑은 아낌없이 넘쳐난다. 그는 하루가 멀다하고 아이들에게 "보고싶다"는 편지를 쓰거나 아이들의 생일날 자작시를 코팅해 선물하는가 하면 토끼풀로 꽃시계도 만들어 준다.

때로는 아이들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 앞에서 "죽음이 두려워질 지경까지" 혼자 운동장을 뛰는 "몸으로 하는 사랑"을 감행하고 선생님이 늘 "그리워하는" 아이들, 선생님이 보고픈 아이들은 마침내 눈물로 소리친다. "제발 우리를 포기해주십시오. 다른 반처럼 때리고 마십시오."

물론 그에게도 '슬프고 비참한 날'은 있다. 그런 날은 '담임을 포기함으로써' 아이들을 '마음에서 지우려고도' 해본다. 그러나 '사랑의 기적'은 절망의 끝에서야 더욱 아름답고 강하게 피어난다는 걸 그는 안다.

그러기에 그는 "달리는 사람은 아름답다/ 손 내밀어 일으켜주며 / 함께 달리는 사람은 아름답다/ 일등도 꼴찌도 없이/ 편대를 지어 하늘을 나는 새처럼" 이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작년에 담임을 맡았던 여자아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주는 동안 안 교사의 표정은 담담해 보였다. 생각컨대 학교의 일상 속에서 이미 '함께 달리며' 일체가 된 안 교사와 아이들에게 '스승의 날'은 그리 특별한 날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안 교사에게 모임에 참석한 제자들이 특별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a 모임을 주선하고 사회를 맡은 배태성씨

모임을 주선하고 사회를 맡은 배태성씨 ⓒ 윤지형

고교 시절 호텔 잡역부로 일한 어머니의 직업을 담임에게 당당하게 얘기하고 입사 원서에도 그렇게 적는 것을 고집함으로서 안 교사를 오히려 가르치기도 했다는 배태성씨는 지금은 작은 가게의 어엿한 사장님이 되었으며, "냉이꽃처럼 작지만 예뻤던 아이 남희"는 다소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나 좌중을 흥겹게 했고, "언젠가 저 마음 아파할 때 같이 아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라고 편지에 썼던, 그래서 안 교사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시를 헌정하게 만든 수진(가명)은 여전히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햅번을 생각하게 하는" 모습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 뿐 아니다. '선생님을 말없이 지켜 주는 아이' 종미, 편모 슬하에서도 언제나 꾸밈없이 해맑은, 꿈이 간호사라 했던 반장 수지, 부모의 이혼으로 방황했던 선미(가명) 그리고 안 교사의 표현대로 "흔들리면서 피어나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다 안 교사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나 큰 "생명값"을 지닌 존재들로서 그 날의 작은 모임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 있었다.

오후 4시 경 제자들이 스승의 책 몇 대목을 돌려가며 읽는 것으로 기념회는 끝이 났지만 창 밖 5월의 봄비는 오히려 줄기차게 쏟아지며 멈출 줄을 몰랐다. 서점 문을 나서면서 나는 잠시 망연자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경박하고 삭막해 보이기만 하는 시대에 아직도 "선생님이 보고픈 아이들"이 존재하며 또한 그 이상으로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선생님"이 존재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립다, 보고 싶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살갑고 애틋하고 정겨운 무엇 아닌가?

a 이쁜 책 표지

이쁜 책 표지 ⓒ 윤지형

그들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우리 교육에 희망은 있는가? 공교육의 위기, 학교 붕괴가 공공연히 거론되고, 학교의 학원화가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대, 인간 교육의 깃발을 든 교사들이 날이 갈수록 외로워지고 힘들어하고 있는 이 시대에 누군가 희망을 묻는다면 나는 말하고 싶다.

당신이 진정 교육의 인간화를 소망한다면 맘을 모으고 눈을 빛내며 찾아보아야 한다고.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선가, 인간상품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전락해 가는 학교에서 고집스럽게 사람 냄새를 풍기며 살아가고 있는 저 촌스러워 보이는 교사 안준철과, '안준철들'과 생명과 사랑 그 자체로 살아있어야 할 아이들을 눈을 들어 바라보아야 한다고.

여름밤의 개똥벌레처럼, 청정 계곡의 쉬리나 개펄의 흰발농게처럼, 들꽃의 합창처럼 빛인 듯 소금인 듯 존재하는 그들, 바로 그들을 우리가 만약 상상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을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오늘 나는 '안준철과 그의 아이들'과 함께 가까스로 안심한다. 그래도 다시금 희망을 묻는 학부모, 교사, 예비 교사, 아이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또한 권하고 싶다. 절망을 말하기 전에 <그 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우리교육 2004)의 세상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보시기를.

그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 안준철의 교육에세이

안준철 지음,
우리교육,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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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고교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인간의 교사로 살다>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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