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승
여섯 평 남짓한 작은 곳이지만 목회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나 된다. 두 목회자는 그 집의 아들들이며 부모님은 그들에게 거실을 교회공간으로 빌려 줬다. 김천응(하늘 응답), 김혜일(은혜로운 날) 두 사람은 신학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다. 그 공간에서 그들은 형과 동생이고 전도사다. 그들은 격주로 번갈아 설교를 한다.
그들의 어머니는 자녀 네 명에게 색소폰, 베이스, 드럼,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들은 이제 다 자라서 쿼텟(사중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막내 여동생은 여섯 평짜리 교회의 반주자다. 전도사 오빠가 "찬송가 000장 부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작은 전자 키보드로 반주를 한다.
어버이날이 있었던 그 주의 일요일은 작은 전도사 차례. 설교의 제목은 '탕자의 귀향'이었다. "렘브란트의 마지막 그림은 '탕자의 귀향'이었습니다"로 말문을 연다. 그리고 본인의 고백을 곁들인다.
권위적인 아버지, 무서워 말을 걸어볼 수 없었던 학창 시절의 선생님, 종적인 관계 속에서, 그것에 말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자라온 자신의 내성적이고 여성적인 모습을 어느 날 발견하고 스스로 도전과 해결을 결심한다.
그래서 나이 서른 두 살에 아버지를 껴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 사랑합니다. 목욕탕에 같이 가요. 산에도 같이 가고 싶어요. 여러 번 말하고 싶었는데 말 못했어요"라고 고백한다.
탕자에게는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는 아버지가 있지만, 시기하는 장자도 있다. 따지는 장자에게 아버지는 "너는 이미 내 안에서 누리고 있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끝으로 둘째 아들 전도사가 들려준 음악은 '장사익'의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다. 작은 모노앰프로 듣는 노래, 찬송가는 아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부엉새도 울었다오/나도 울었소/가랑잎이 휘날리는/산마루턱에….
작은 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눈물을 글썽인다.
가수 장사익은 2천 혹은 3천의 관객을 앞에 두고도 기타 한대와 목소리 하나로 사람들을 자기 세계로 몰입시키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누가 부른 노래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용기 있고 적절한 선곡에 의해서 '음악의 힘'은 작은 공간에서도 발휘된다.
"교회 음악이 얼마든지 많이 있었을 텐데, 이 곡을 선곡한 이유는 뭡니까? 마음에 감동과 힘을 주는 한 곡의 유행가요가 100곡의 찬송가보다 유용하다면, 저는 주저 없이 그 음악을 선택하겠습니다. 한 곡의 뽕짝이 한 사람의 마음에 힘을 줄 수 있다면, 그 순간 찬송가쯤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어요."
종교 안에서 "'형식'을 선택할 것인가 '본질'을 선택할 것인가"로 고민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본질을 선택했던 것 같다. 비 오는 일요일,그의 선곡과 날씨는 너무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