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역은 ‘희망역’입니다

[태우의 뷰파인더 27] 지하철에 사람이 있었다

등록 2004.05.20 22:36수정 2004.05.2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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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시내에 볼 일이 있어서 지하철을 타고 나갔다가, 문득 며칠전 TV 뉴스에서 다뤘던 지하철 역사 내 자살 사건이 떠올랐다.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 바로 ‘이 역’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철로 사이 흥건했을 붉은 피를 가리기 위해 뿌려진 모래가 TV 브라운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미 비극적인 상황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철로에 뛰어들었던 이름 모를 사람의 절망감은 섬뜩하게 느껴졌다. 지하철의 안내방송이 들려오고, 지하통로 저만치에서 역으로 진입하는 지하철을 볼 때, 자꾸만 그 비극적인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누구인가. 누가 그들을 달리는 지하철로 매정하게 내모는가. 혹시라도 나와 당신이 그들의 등을 떠밀었던 것은 아닌가. 국가와 정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점점 둔감해져 가는 가슴에 뜻 모를 파문이 일었다.

지하철이 도착했고, 몸을 실었다.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살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고개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방아를 찧고 있고, 일상의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술을 한잔 걸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태우
그 때였다. 빨간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작은 캐리어를 끌고 내 앞에 나타난 건.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는 앵벌이의 비리를 알게 된 이후, 나는 지하철에서 도움을 청하는 어떤 사람의 요구도 들어주지 말자는 철칙을 정했다. 그들에게 주는 몇 푼의 동정이 그들의 인생을 더욱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얗게 머리가 샌 할머니가 내 앞에 껌 한 통을 내려놓으셨다.

‘빨간 조끼 할머니’를 보자, 돌아가신 친할머니 생각이 났다. 어릴 때 배가 아프면 할머니는 “할머니 손은 약손”하며 내 배를 어루만져 주셨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복통이 사라졌다.


순순히 나는 할머니의 껌을 사드렸다. 껌 한 통이 500원이었는데, 동전이 없어서 1000원을 드렸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세일즈 정신’을 발휘해서 내게 거스름돈 대신 껌을 한 통 더 내미셨다. 나는 껌을 사양하며 한 통으로 충분하다는 내 의사를 전했다.

“고마워. 복 받을겨.”


김태우
할머니는 내 다리를 툭 치시며 한 마디를 건네시고 계속해서 걸어가셨다.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는 지금 불황의 시대를 살고 있다. 조금만 신경을 쓰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노숙자들이 눈에 들어오고,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뉴스에서는 연일 슬픈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를 버리고 방치하는 부모들의 이야기,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빚을 감당할 길이 없어 자살하는 신용불량자와 그 가족들, 부조리에 대한 마지막 저항으로 분신을 하는 사람들,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절망하는 젊은 영혼들….

이날 지하철에서 문득 이 사회에 대해 한없는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함께 사는 사회’라는 거창한 구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온정을 가지려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되어야 하고, 그것은 때때로 ‘약자를 안아주고 내 빵을 나누어줄 수 있는 용기’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정말 ‘함께 살고 있는 것’이 되리라. 가슴 아픈 뉴스가 자꾸만 반복될수록 그러한 뉴스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생긴다. “원래 세상이 그렇잖아”,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게 당연하지, 뭐” 하는 무서운 말들도 들려온다.

가슴 아픈 뉴스를 들을 때마다 가슴 아플 수 있어야 한다. 아무나 가슴 아플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연민과 눈물이야말로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김태우
나는 혼자서 상상을 했다.

“다음 역은 ‘희망역, 희망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내릴 실 때엔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 한 조각 꼭 놓고 내려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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