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소설] 호랑이 이야기 28

천왕봉의 매미선녀 2

등록 2004.05.21 03:24수정 2004.05.2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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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호종단과 수단, 그리고 호종단을 따르고 있는 또 한 명의 산오뚝이는 천왕봉에 이르러 매미가 살고 있을 만한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오는 것을 알고 있는 매미 선녀는 이미 샘물을 조금 길어서 호리병에 담아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있었습니다. 새미 선녀가 사라진 후 매미 선녀의 부채하나만으로는 역술서를 지킬 수 없게 되었고, 천왕봉에 있는 산오뚝이들의 도움을 받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놓은 것이었습니다.


호종단이 물었습니다.

“혹시 매미 선녀가 그 역술서를 가지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것이 아닐까?”

”그럴 리는 없수다, 하늘나라에는 이세상의 종이로 쓰여진 책은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게 되있수다. 용궁에 가지고 들어가려면 가겠지만, 매미가 용궁선녀가 아닌 이상 지금 용궁에 들어가기도 무리외다, 이 산 어딘가에 있어야하외다.”

산오뚝이와 호종단은 산 여기 저기를 헤매어 봤지만, 어디에서도 역술서가 있을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선녀부채가 하나로 줄어든 이상 그것만으로 완벽한 위장전술을 쓰는 것 역시 무리가 되었습니다.

“참 기가 막힌 노릇이군. 하늘에 오른 것도 아니고, 용궁에 간 것도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호종단이 정말 기가 막힌 듯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산오뚝이는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까부터 이상한 바위 하나가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리산을 자주 와본 그 산오뚝이는 그 바위가 이전에 못 보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가만히 서서 그 바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호종단이 물었습니다.


“대체 거기에 무엇이 있느냐…”

바위구석에서 돌덩어리 하나가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더니 산오뚝이는 날개를 펴고는 그쪽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호종단과 수단 역시 그 뒤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산오뚝이는 그 바위 밑에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매미 선녀. 그 바위 뒤에 숨어있는 것을 전부 알고 있수다.”

바위는 잠잠하기만 했습니다. 저 위에서 돌덩이 하나가 데굴데굴 또 떨어졌습니다. 호종단과 수단은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산오뚝이는 떨어지는 돌덩이를 받으려는지 팔을 힘껏 벌리고는 꼼짝도 않고 있었습니다. 돌덩이가 거의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 엿차 하며 바위를 땅에 내꽂았습니다. 그 산오뚝이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돌덩이가 아닌 다른 산오뚝이의 꼬리였습니다.

“매미 선녀가 산오뚝이들을 모아서 이런 바위를 만들어놓은 것이 틀림없소. 그래서 여기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란 말이외다.”

산오뚝이는 그 바위를 향해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매미 선녀, 어서 나오라, 이제 거기 숨어도 소용 없도다.”

그때였습니다.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 같던 그 돌무더기들이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워있던 커다란 바위가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위가 움직일 때마다 부서지고 주저앉는 나무들 사이로 그 어마어마한 바위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위였습니다.

지리산의 다른 봉우리를 한쪽 팔로 누르고 육중한 몸을 겨우 겨우 일으키는 가 싶더니 두발로 완전히 서있는 그 모습은 또 다른 봉우리 하나가 들어선 것 같았습니다.

호종단의 산오뚝이는 어찌해야할지 몰랐습니다. 호종단 역시 뒤로 주춤하기만 할뿐 무어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바위거인은 지리산 다른 봉우리에서 손을 떼어 호종단 쪽으로 한발자국씩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위거인의 뒷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세상의 물은 단지 네 혼자만이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물은 모든 중생들의 것이야! 역술서를 빼앗고 싶으면 어디 와서 한번 빼앗아 보시지.”

매미 선녀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들을 향해 바위거인이 움직일 때마다 지리산 온 자락이 울리는 듯 했습니다. 바위거인이 한 손으로 땅바닥을 내리치면 금방이라고 땅이 갈라지고 용암이 솟구칠 것 같았습니다. 수단은 그 바위거인을 보고 엄청난 소리로 짖어대었습니다.

미련하고 약한 것으로만 알고 있던 지리산의 산오뚝이들이 한데 모여서 만들어낸 거대한 바위거인이었습니다. 호종단과 함께 서있는 산오뚝이들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오뚝이들은 아직 여러 모로 부족한 존재였고 호종단의 산오뚝이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호종단이 산오뚝이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앞으로 다가오는 바위거인의 무릎에 올라앉았습니다. 그래서 성큼성큼 뛰어 어깨에 오르고 다시 등을 타고 내려가 엉덩이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에서 숨어있는 산오뚝이 하나를 잡아 꼬리를 뽑아내자 엉덩이 부분에서 돌무더기들이 우두둑 땅으로 쏟아져 내렸고, 힘을 잃은 바위거인은 어쩔 수 없이 한꺼번에 쓰러져 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호종단은 큰소리로 어이없다는 듯 웃기만 했습니다.

무너져 내리는 바위거인의 뒤에서 날개옷을 입고 하늘에 떠있는 매미 선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무조각과 돌덩어리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어리기만한 산오뚝이들을 애가 타는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매미 선녀는 오른팔에 책 한 권을 꽈악 껴안고 있었습니다. 바로 호종단이 그렇게 찾던 역술서였습니다.

매미 선녀가 말했습니다.

“호종단이여. 이제 한낮 꿈을 버리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소서, 이 역술서는 모든 중생들이 것입니다. 모든 천지와 자연이 먹고 마셔야하는 물의 흐름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호랑이들의 꾀임에서 벗어나 편안히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소서.”

호종단이 대답했습니다.

“이제 나의 고향이란 없다. 내가 살던 송나라도 지금은 없다. 난 갈 곳도 없고, 그리고 가고 싶은 곳도 없다. 나는 오직 그 역술서를 찾기 위해 몸을 다시 입었으니, 그것만이 내가 해야하는 일이요. 지금 내 살과 뼈를 버리고 다시 그 바닷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이요? 그건 싫소.”

매미 선녀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그러자 산오뚝이가 말했습니다.

“매미 네가 그 옷을 입고 어디로 날아오르더라도, 우리가 찾지 못할 것 같나. 이제 새미 선녀도 이 세상에 없으니 순순히 포기하고 책을 넘겨주는 것이 어떨지…”

매미 선녀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홀연히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호종단이 수단에게 말했습니다.

“수단, 저 선녀가 숨겨놓은 호리병을 찾아라.”

호종단이 송나라에서 한반도에 왔던 그 당시처럼, 분명 매미 선녀는 그 산 어딘가에 샘물의 근원에서 물을 조금 담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놓았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수단과 호종단이 물을 말려버리면 다시 그 물을 근원에 흘려버릴 것이 뻔했습니다.

수단이 산을 울리는 엄청난 소리로 포효하자 산에 살던 새들이 날개짓을 하며 퍼드득 날아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어딘가를 향해서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수단이 달리는 곳은 나무들이 알아서 길을 내어 주는 것처럼 무지막지한 그의 발의 밟혀 뿌리가 꺾여 풀썩 풀썩 주저앉기만 했습니다. 수단이 어딘가에 이르러 땅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더니 조그만 절터를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절간 앞에 이끼로 덮인 부도 앞에서 컹컹 짖는 것이었습니다.

수단은 물의 근원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내는 놈입니다. 비록 부도 앞에서 짖고 있지만, 그 부도가 지리산 샘의 근원일 수는 없습니다. 그곳에 매미선녀가 숨겨놓은 호리병이 있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수단을 시켜 부도를 무너뜨리고 그 안에 있는 호리병을 꺼내 물을 땅으로 흘려보내었습니다.

수단은 산오뚝이와 함께 순식간에 천왕봉 정상으로 달려가 샘물에 입을 담그고 샘물을 말려버렸습니다. 샘물이 마르면서 땅이 뜨거워지고 또 한번 연기가 치솟았습니다. 지리산에 있던 나무들이 모두 쓰러지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호종단은 그 절 어귀에 찢겨진 옷처럼 내던져진 역술서를 발견하였습니다. 역술서를 품에 안고 숨어서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이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던 매미선녀는 끝내 안개가 되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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