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소설]호랑이 이야기 29

호랑이 동굴의 버드나무 가지를 찾아서 1

등록 2004.05.24 04:45수정 2004.05.2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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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계와 산과 바다, 그리고 금빛으로 빛나는 새들과 기린이 노닐던, 지리천문신장님이 사시는 아름다운 오두막집을 나온 바리와 백호는 두 분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천문신장님이 나침반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손바닥에 올리고 그냥 가고 싶은 곳을 이야기하면 된다. 백호의 손을 붙잡고 말이야.”


바리는 천문신장님과 바로 헤어지는 것이 싫은지 여전히 도포 자락을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천문신장님은 바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우린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부인님도 바리를 가슴에 꼭 안아주셨습니다. 하늘빛과 땅빛으로 빛나는 치마저고
리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났습니다.

"바리는 잘 해낼 거야. 우리는 바리를 믿는단다."

부인님께서 당부해 주셨습니다.


바리는 손바닥 위에 나침반을 올려놓았습니다. 백호는 앞발을 들어 바리의 손에 얹었습니다. 그 발을 꼭 잡고 바리가 말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이 천주떡 먹고 힘을 내겠습니다."


침을 한번 꾹 삼키고는 나침반을 보며 말했습니다.

"지리산으로 데려다 주세요."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천문신장님을 빤히 쳐다보자, 웃음을 띠우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고 싶은 곳만 이야기하면 된다. 데려다 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바리는 내심 부끄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다시 또렷이 말했습니다.

"지,리,산."

그러자 나침반의 바늘이 갑자기 팽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어딘가를 가리키며 멈춰섰습니다. 단지 그것이었습니다. 바리가 고개를 들어 말했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일이 없....."

바리는 이미 이상한 곳에 와있었습니다. 나침반은 소리도 없이 그 두 명을 이미 지리산 어귀에 데려다 준 것이었습니다. 백호도 바리의 손을 잡고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황폐해진 산 뿐이었습니다.

지리산이 황폐해진건 어제 오늘일이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 갑자기 지리산의 나무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고 강물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하더니 한반도의 산들이 많이 죽어버렸습니다. 나무들이 저절로 말라죽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일부러 산을 파헤치고 무언가 열심히 지어올리기도 했습니다.

나무들이 많이 죽어버린 지리산을 보고 백호는 말했습니다.

“ 매미 선녀가 인간계를 떠난 지 벌써 6년이나 지났구나.”

“ 매미 선녀라니?”

“ 지리산은 한반도의 물길이 시작하는 곳이었거든. 그런데 그 물길을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어…….”

백호는 산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바리에게 호종단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하나 들려주었습니다.

“그럼, 우리 나라 강물이 썩어들어가고 산의 나무들이 죽어간 게 전부 다 그 호종단하고 수단이라는 개 때문이야?”

“그래…. 그리고 그 역술서 덕분으로 사람들의 몸을 입고 강물과 산을 해치려는 그 나쁜 호랑이들과 산오뚝이들….. “

백호는 답답한지 그렇게 짧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나무들은 많이 말라버렸지만 산봉우리들은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고래등처럼 높은 봉우리가 펼쳐진 이 넓은 곳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가지고 있는 호랑이들을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바위와 죽은 나무들로 앙상한 지리산은 그냥 그렇게 보기만 해도 마음씨 나쁜 호랑이들이 득실거리는 곳 같았습니다.

“바리야, 저리로 가보자.”

백호는 한 봉우리를 향해 앞발을 내딛었습니다. 저 앞쪽으로 높은 절벽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위에 올라간 백호는 하늘을 향해서 이상한 소리로 울부짖는 것이었습니다.

“딸그락….. 딸그락…..”

백호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나무 조각이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위덩어리가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딸가닥… 떨거덕…..”

그 소리는 지리산에 울려퍼지더니 여기저기서 비슷한 소리가 펴져 나왔습니다.

“달가닥.. 가닥.”

“덜거덕 드르륵”

“달가닥 달가닥 가닥 가닥.”

바리는 백호가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절벽 아래 모래밭에 무언가 시커먼 것이 하나 빠끔 나타났습니다. 저 수풀 속에서도 하나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 건너 나무 뒤에서도 시커먼 머리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누런 이퍼리가 수북이 덮여있는 나무 가지 사이로도 하나가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다들 절벽 아래로 모였습니다. 전부 다 꼬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보육원에서 보았던, 혜리를 잡아간 그 날개 달린 이상한 것들과 너무도 똑같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아래 모인 거무스름한 사람들은 보육원에서 보았던 것과는 모습이 많이 달랐습니다. 둥그런 눈에는 맑은 물이 모여 있는지 착한 기운이 가득했고, 온 몸에 사마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긴 했지만, 나무 색깔을 닮은 듯 푸르스름한 빛이 돌았습니다.

그것들은 매미 선녀 덕분에 붉은 눈의 호랑이들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아직까지 나무와 바위를 지키며 살고 있는 산오뚝이들이었습니다. 아직 죽지 않은 나무들을 돌보며 비가 내리는 날 빗물을 받아 나무들에게 물을 주기도 하고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곳에 어딘가에서 나무그루를 가져와 심어서 숲을 조금씩 가꾸고 있는 착한 산오뚝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웬만큼 모이자 백호는 바리를 등에 업고는 성큼 절벽 아래로 내려가 산오뚝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이곳에 호랑이들의 동굴이 어디에 있지?”

산오뚝이들은 누구 한명이 나와서 이야기하지 않고 전부 한마디씩 웅성웅성하며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산오뚝이들아, 한명만 이야기해라.”

백호가 가장 앞에 있는 산오뚝이를 가리키며 이야기하자 그놈은 겁이난듯 아니면 부끄러운 듯 뒤로 주춤거리며 다른 친구들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다른 산오뚝이에게 부탁을 해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백호가 답답한지 말했습니다.

“큰일이군…. 산오뚝이들이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원…..”

어딘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바리가 말했습니다.

“백호야, 저것 좀 봐.”

산오뚝이들은 무어라 이야기하기를 그치고, 전부 고개를 돌리고 팔을 뻗어서 한곳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없는 절벽이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산오뚝이들이 전부 웅성거렸습니다. 처음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귀를 기울여보니 모든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저기… 저기…..”

“번개… 번개…..”

바리가 물었습니다.

“저기.. 번개가 무슨 말이야?”

곰곰이 생각하던 백호가 말했습니다.

“저기에 번개가 치면 문이 열린단 말이야. 보아하니 호랑이들이 꽤 많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구나. 저 봉우리에는 서천꽃밭의 꽃들을 모아다가 호랑이의 몸을 입혀주는 도술약을 만드는 곳이 있는 모양이다. 그 약을 금강산 너머의 호랑이 나라로 실어 나르고 있는 게 분명해.”

산오뚝이들은 전부 열심히 입을 놀려 계속 무언가 중얼거리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백호의 말이 맞다면서 고개짓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리가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 번개가 칠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럴 필요 없어.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어. 등에 타라.”

바리가 백호의 등에 올라 산오뚝이들에게 말했습니다.

“고맙다, 산오뚝이들아! 우리가 일을 다 끝날 때까지 지리산의 나무와 바위들을 지켜줄거지?”

산오뚝이들은 전부 하나가 되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풀밭 위를 스치는 맑은 산들바람 소리 같기도 했고, 푸른 풀피리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백호는 바람을 가르며 그 절벽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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