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소설]호랑이 이야기 30

호랑이 동굴의 버드나무 가지를 찾아서 2

등록 2004.05.26 01:22수정 2004.05.2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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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오뚝이들이 일러준 절벽 아래에 이르자 백호는 바리에게 말했습니다.

"바리야. 천주떡을 한개 먹어라. 내가 저 위에 소나무를 밟고 올라가면 곧장 번개가 치면서 절벽의 문이 열릴 거야. 안에 들어가서 먹으려면 시간이 없어. 그러니까, 지금 먹고 들어가는게 좋을 것 같애."


"저 안에서 먹으면 안돼?"
"저 안에 들어가면 바로 무슨 일이 있을지 나도 모르거든…."

바리의 얼굴에 불안한 기운이 스쳤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저 안엔 호랑이들과 산오뚝이들 밖에 없어. 그 놈들은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해. 게다가 천주떡까지 먹었으니 넌 두려워할게 아무 것도 없지."
"그래도…."

아직 바리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신선 할아버지의 말 벌써 잊어버렸니?"


백호의 말이 맞았습니다. 무서워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서워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바리는 보자기를 열어 그속에 담겨있는 불그스레한 떡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습니다.

잘근 잘근 잘근 잘근


생전 처음으로 맛보는 신비로운 맛이 났습니다. 맛을 코와 혀로 느껴본 일은 있지만, 이렇게 가슴 속까지 내려오는 맛은 처음이었습니다. 아주 부드러워 특별히 씹을 필요도 없었지만 열심히 이를 놀려 씹어보았습니다. 한번 씹을 때마다 무언가 기운이 머리와 가슴을 통해 휘감고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바리는 그 천주떡을 꿀꺽 삼켰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무언가 엄청난 변화라든가, 힘이 솟는 것 같은, 신비한 능력을 기대한 바리는 떡을 먹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자 허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백호와 함께 저 절벽 속으로 들어가서 버드나무 가지를 받아가지고 나올 수 있을지….

"자, 가자."

바리를 등에 태운 백호는 절벽 건너편 소나무 쪽으로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백호의 발이 소나무에 닿자마자 정말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에서 벼락이 치면서 앞 절벽에 내려 꽃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절벽에서는 돌무더기가 우르르 무너지면서 문이 생겼고, 그 틈을 타서 백호는 그 안으로 가뿐히 들어갔습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그냥 가파른 절벽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밑으로 깊은 동굴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자마다 바로 땅 밑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에 바리는 약간 놀라긴 했지만 겁이 나진 않았습니다. 백호의 목만 꼭 붙들고 있으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이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래로 곧게 뻗은 것 같은 그 기다란 동굴을 백호는 네 다리로 잘도 뛰어 바닥에 이르니 아주 넓은 곳이 나왔습니다. 백호의 등에서 내린 바리는 무슨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였습니다. 햇빛이 들지 않은 곳이지만, 어디선가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어두워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그 소리는 발 밑에 흐르고 있는 시냇물 소리가 틀림없었습니다.

"아…"

바리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지리산의 물길은 마르고, 바깥세상의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 산의 아래로는 물길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호종단이 물길을 틀어서 이 아래에 흐르게 한 것일거야."

백호가 말했습니다. 눈이 점점 트여지기 시작하여 주변을 좀더 자세히 볼 수 있었지만 근처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백호는 바리와 함께 앞으로 걸어나갔습니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는 어느 곳에서는 콸콸 거리면서 더 커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은 더욱더 밝아졌습니다.

백호와 바리는 걸음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시냇물줄기 옆으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습니다. 눈송이처럼 하얗게 빛나는 꽃, 진달래 꽃처럼 불그스레한 꽃들이 여기저기 있었습니다. 백호가 말했습니다.

"살오름꽃과 뼈오름꽃이로구나. 이 꽃들을 서천꽃밭에서 전부 훔쳐서 이곳에 모아놓은거야, 그래서 이 꽃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서 여기서 물길을 터놓은거고…."

어디선가 모르게 들어오는 실바람에 꽃잎들이 파르르 떨었습니다. 그 바람이 들어오는 곳을 찾아 고개를 든 바리는, 그 앞으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무언가가 모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파랗게 타오르는 불꽃…. 그 모양은 고양이 같기고 하고 사자 같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호랑이들이었습니다. 그 붉은 눈의 호랑이들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천주떡을 먹은 바리의 눈에 호랑이들은 그렇게 불꽃처럼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호랑이들 한 가운데 뭔가 씨앗 같은 것이 들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 불꽃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에 모여들고 있는 호랑이 하나하나에 영혼들이 하나씩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호랑이가 된 사람들의 영혼이로구나….'

백두산 산신 할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 진달래 선녀가 말해준 것이 기억났습니다.

"눈동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호랑이의 눈을 본 사람은, 그 붉은 눈 호랑이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사람의 영혼까지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아무도 공격하지 못하지. 그러니까, 너만이 너의 부모님과 친구들을 구할 수 있어."

바리가 본 호랑이들의 눈이 붉다고 느낀 것은 저렇게 영혼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불꽃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천주떡의 도움으로 그 불빛은 더욱더 명확히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그 사람들의 모습 역시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바리는 말을 잃고 그냥 서있기만 했습니다. 호랑이들은 바리와 백호 주변으로 수십 마리가 몰려들었지만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분명 바리를 겁내고 있던 것입니다.

바리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너희들이 빼앗아간 삼신할머니의 버드나무 가지를 찾으러 왔어. 얼른 돌려줘."

호랑이들은 콧바람을 내며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버드나무 가지를 얼른 돌려줘. 삼신할머니가 점지한 아이들이 곧 나올때가 되었단 말이야."”

바리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호랑이들 중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버드나무 가지를 가져간다고 해도, 우리의 계획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우리의 영혼을 볼 수 있는 그 잘난 신통력을 가진 너 같은 계집아이가 우리의 계획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바리가 말했습니다.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야. 여기 백호도 있고, 신령님도 있고, 선녀들도 있고, 그리고 가신들이 도와주실 거야."”

백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여기서 너희들이 사는 나라까지 얼마나 먼가?"

다른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그건 네가 이미 알고 있을텐데…. 이제 더이상 이 반도의 산에서 신선들을 도와 놀고 있는 호랑이는 없다. 바보 같은 너 혼자만 남았어. 바보 같은 짓하지 말고, 우리 나라로 들어오는 것이 어떨지…."

"산에 호랑이들이 얼마나 남아있건 말건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나와 같은 호랑이가 이곳에 얼마나 남아있는지 그건 내게 절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러면서 백호는 동굴이 떠나갈 듯 포효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듣던 것과는 다른, 약간 슬픈 빛이 감도는 소리였습니다.

"버드나무 가지가 어디에 있느냔 말이야."

주변에 있던 호랑이들이 점점 가까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버드나무 가지는 이제 우리 거야. 삼신할머니가 점지한 아이들이 태어나도 그애들은 다시 곧 우리 호랑이들로 태어날거야. 이제 인간들은 더이상 여기서 태어나지 못해."

그들은 아까와는 달리 금방이라도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 것만 같았습니다. 파랗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검은 붓으로 그려놓은 듯한 호랑이의 눈들이 매섭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리가 어찌해야할지 모르고 조금씩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백호가 말했습니다.

"넌 이미 알아, 넌 이미 알고 있다고. 저중 아무라도 공격을 해오면, 넌 그때, 그대로 하면 돼. 그냥 그대로…."

바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난 몰라.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천문신장부인께서 어떻게 해야 호랑이랑 싸우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으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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