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철인가? 오늘따라 보리밥 먹고 싶다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57]웰빙시대 보리밥이 좋다

등록 2004.05.25 15:11수정 2004.05.25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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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엔 섬유소도 많답니다.
보리밥엔 섬유소도 많답니다.김규환
지금도 북한 사람들은 고깃국에 이밥 한번 먹는 게 소원이란다. 이에 아랑곳 않고 남쪽은 쌀밥에 고깃국 배불리 먹더니 양식(洋食) 시대를 거쳐 이젠 웰빙 시대를 살고 있다. 의식주 모든 분야에서 질을 추구하는 시대. 그늘은 많지만 분명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다.


군사독재에 자유와 인권이 유린되고 먹을 게 없어 하늘을 원망하던 남한도 그에 못지않을 때가 있었다. 70년대 중반까지는 오히려 이북이 경제 사정이 더 좋은 데다 배급제가 힘을 발휘하던 시기여서 굶지는 않고 살았다고 한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남과 북의 살림살이에서 확연히 드러나 가슴이 미어진다. 잘잘못을 떠나 어찌 이리도 차이가 심하단 말인가.

남한에도 해마다 이 때쯤이면 ‘보릿고개’라는 험난한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를 잘 넘겨 보리가 익을 때까지 버티면 그나마 목숨은 연명하였다. 비유로 ‘겉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현재는 물가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보리쌀은 그 때만 해도 지금의 쌀 가치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귀중한 식량이었다.

1. 먼저 상추를 손으로 뜯어 올립니다.
1. 먼저 상추를 손으로 뜯어 올립니다.김규환
‘보쌀’ 그 낯익고 서러운 이름이여! 까만 줄 쭈욱 그어진 보리쌀, 밥을 해 놓으면 더 선명해지는 가난의 상징 보리밥 그리고 꽁보리밥. 밥 맛이 없다는 소리에 아예 ‘숟가락 놓으라(?)’던 처절한 삶을 잘도 헤쳐 나왔다.

보리쌀은 그냥 불려지지도 않았고 삶아도 퍼지지도 않았다. 담가 뒀다가 확독에 둘둘 갈아서는 다시 끓여서 담가 둔다. 건졌다가 밥 바구리에 걸어 두고 밥 할 때마다 필요한 양만큼 꺼내 아버지 드실 한 줌의 쌀을 올려 보리밥을 했다. 집집마다 그랬다.

그러니 농촌 인구가 대부분인 당시엔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동서로 가르면 영동과 영남은 겉보리 경작지라 더 힘겨웠던 반면 서쪽 호남과 논산 평야 일대는 그래도 보리로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2. 생채까지 다 올리셨습니까?
2. 생채까지 다 올리셨습니까?김규환
소위 망한 집구석이었던 우리집엔 보리쌀마저 떨어져 어머니께서 옆집으로 구하러 다니는 걸 몇 번이나 목격하던 때도 있었다. 얼마나 먹을 식량이 없던 궁벽한 곳에서 살았으면 세 들어 살 때는 주인집과 쌀독을 함께 써도 무방하였다. 가져갈 게 없었으니까.

보리 타작하기 전에도 덜 익은 보리를 따와서 풀과 함께 넣고 죽을 끓여 먹던 시절이 불과 30년 전의 일이다. 그렇게 자란 어린 아이들이 이젠 30줄 후반 몇 명에 4~50대가 주다. 그 때 배불리 먹이지 못해 한이 된 어머니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어 할머니가 되었다. 대부분의 아버지는 벌써 세상을 등졌을 터.


그 시절은 백마디 아니 수천마디 말로 표현하기 어렵게 힘들었다. 그래서 내 키도 크지 않았던가.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그 고난의 시절이 없었던들 지금의 우리가 있었겠는가.

그 땐 힘들어도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다. 아이를 내다 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큰 집, 작은 집으로 보내져 핏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차렸다. 어찌되었든 함께 살아보려고 갖은 애를 써보고 정 안되면 아는 집으로 양자 양녀로 보내기도 했다. 그 때 고생깨나 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3. 고추장에 대한 유혹을 떨칠 수 없다면 최소한으로 한정하세요. 애초엔 비빔밥에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3. 고추장에 대한 유혹을 떨칠 수 없다면 최소한으로 한정하세요. 애초엔 비빔밥에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습니다.김규환
4. 이 된장을 둘둘 끼얹어 비비면 밥이 따로 노는 수가 있습니다. 이게 싫으시면 쌀밥 두 술을 달라고 하세요.
4. 이 된장을 둘둘 끼얹어 비비면 밥이 따로 노는 수가 있습니다. 이게 싫으시면 쌀밥 두 술을 달라고 하세요.김규환
서러웠다. 배고파 서러웠다. 군것질거리도 안되는 것이 주식이었고 내다버려야 할 상한 음식이 먹을거리였다. 굶는 게 밥 먹듯 했던 그걸 아는 사람들은 누가 서럽지 않고 눈물겹지 않을까보냐.

천성과 식성은 못 버리는가 보다. 오늘따라 보리밥이 먹고 싶은 건 또 뭔 조화인가. 물리기보다 없어서 못 먹었지만 어느새 천덕꾸러기가 된 보리밥 타령을 하고 있으니 내 입맛 하나는 끝내준다. 제철을 놓치지 않고 땡기니(?) 말이다. 좋은 것 다 버리고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오늘 보리밥 한번 먹으러 가련다.

영양가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불리고 불리기를 반복하여 탱탱 불은 것을 가마솥에 달달달 끓여 김이 푹푹 쏟아지면 불 때기를 멈춘다. 한 짬 지나 한소끔마저 지피면 바닥에 다닥다닥 눌러 붙었다. 물을 붓고 주걱으로 득득 문질러 놓고 또 한번 불을 때면 누리끼리 까만 숭늉에 누룽지 한 양푼 그득이었지.

밥할 때 미리 집 된장을 두 숟가락 퍼 와서 뜨물에 멸치 몇 개 잘게 뽀사 넣고(빻아 넣고) 풋고추 송송 한두 개 썰어 넣으면 이보다 맛난 된장은 없다. 밥솥에 함께 앉히면 밥물이 넘쳐흘러 다소 짠듯하지만 더 진하고 좋다.

때가 때인지라 열무김치 두 종류로 하나는 생김치로 또 하나는 약간 삭혀 서늘한 곳에 뒀다가 큼직하게 올린다. 상추는 때마침 노지에 자란 것은 약간 씁쓸하겠지만 오히려 이게 입맛을 돋우는 데 일가견이 있다. 가위로 자르지 말고 손으로 툭툭 잘라 대충 올려 놓고 된장 끼얹어 밥을 비빈다. 약간 희끄무레하면 공장에서 나오는 고추장이 아닌 꼬창이나 꼬추장을 반 숟갈 넣고 장모님이 보내신 참기름 한 방울 쳐볼까.

나만의 보리 비빔밥
나만의 보리 비빔밥김규환
고소한 보리밥 누룽지 맛
고소한 보리밥 누룽지 맛김규환
함께 간 사람들마다 비빔밥은 언제나 나에게 비벼 달랬다. 같은 재료와 같은 양으로 어찌나 맛깔스럽게 비벼주는지 꼭 부탁을 해 온다. 그 사이 배고파 서러우면 어쩐다지? 내 것도 옆에 두고 둘둘 비벼 떠 먹어가며 고루 섞이게 한번 두번 세번 열댓번 섞다 보면 침이 고이고 잘근잘근 씹다 보면 입안 가득 향이 퍼지고 밀려왔던 허기와 서러움은 온데간데 없다.

내가 비비는 방법은 여기에서 되도록 고추장을 빼는 게 한 가지 방법이고 둘째로는 밥은 적당히 하되 반드시 밥 양보다 나물과 반찬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나물을 먹는지 밥을 먹는지 헷갈릴 지경이면 풍성한 보리밥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런 만점의 밥을 먹고 살찔 걱정을 하는 건 괜한 우려다. 그래도 배부르지 않으면 진한 커피색 숭늉에 다섯 배나 커진 누룽밥을 소화시킬 겸 떠먹어주면 그만이다. 웰빙 식단이라는 게 따로 있지 않다. 영양 과다를 버리고 몸이 필요한 만큼만 꼭꼭 씹어 먹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무척 날이 더워지고 있다. 그 때문인가. 오늘따라 무척 보리밥이 먹고 싶다. 여보! 우리 보리밥 먹으러 갑시다. 해강아 솔강아 오늘은 보리밥 먹으러 가자.

숭늉 한 그릇 먹고 개운하게 나오시기 바랍니다.
숭늉 한 그릇 먹고 개운하게 나오시기 바랍니다.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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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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