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연 키드 '물렁이'의 집요한 압박

이번에는 가위로 담배를 잘라 놓았습니다

등록 2004.05.29 08:24수정 2004.05.2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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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물렁이가 그린 금연포스터.

물렁이가 그린 금연포스터. ⓒ 유성호

지난해부터 은근한 압박을 가해오던 물렁이(큰아이의 별명)의 금연 권유가 최근에는 공세 방법을 달리하면서 수위를 점차 높이고 있습니다.


올 초 어린이집에서 그려 온 금연포스터로 아빠의 가슴을 놀라게 하더니 어제는 급기야 담배를 가위로 잘라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물렁이와 돌콩이(작은아이의 별명)의 번잡한 소리가 잠결에 윙윙거리더니 작은 녀석이 울먹이며 나의 품으로 파고듭니다.

"형아가 가위로 머리 잘랐어. 아빠 빵야도 잘랐다?"

'빵야'는 저희 집에서 사용하는 담배의 은유적 표현입니다. 담배 피우는 것을 아이들이 물어 볼 때면 '빵야'한다고 답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머리칼을 자르는 짓궂은 장난은 몇 번 경험한 터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담배를 잘랐다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 보니 돌콩이의 말대로 담배 한 개비가 갈기갈기 처절하게 잘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는 한 웅큼 되는 머리칼이 널려져 있었습니다. 장난이 점점 심해지는 나이인지라 말로 하는 따끔한 꾸짖음은 이미 약효가 없습니다.


그래서 물렁이의 등을 손바닥으로 몇 차례 두들겨 줬습니다. 매를 때린 이유에 대해서는 가위를 가지고 동생 머리칼을 함부로 자른 것에 대한 벌이라고 설명해줬습니다. 담배를 자른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할말이 없었습니다. 다만 부끄럽지만 매 속에는 담배에 대한 원망도 포함돼 있었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동생 머리를 가위로 마구 자르면 어떻게 해"
"…"
"왜 아빠 빵야는 잘랐니?"
"(울먹이면서)아빠는 빵야 안 한다고 했으면서 계속 하잖아. 약속을 안 지키잖아."

a "물렁아, 미안하다. 아빠 빵야 끊을려고 노력할게"

"물렁아, 미안하다. 아빠 빵야 끊을려고 노력할게" ⓒ 유성호

이번에는 제가 할말이 없었습니다. 물렁이는 이 일에 앞서 은근함과 집요함으로 아빠의 금연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담배 냄새가 난다며 인상을 쓴다던가, 가게에 간다고 나갈 때면 또 담배 사러 가느냐며 심드렁하게 면박을 줍니다.


올 초에 벽에 붙여 두었던 금연 포스터는 얼마 후 떼어서 책상 서랍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금연을 쉽게 결심하지 못할 바에야 눈앞에 두고 심리적 압박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포스터를 꺼내어 다시 봅니다. 그동안 아이들의 낙서가 늘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금연선언이란 글자까지 보입니다.

아이들이 느끼는 금연에는 과연 아빠의 건강에 대한 염두가 들어 있을까요. 저는 분명히 말하건 데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렁이의 금연 권유가 압박으로 느껴지고 다른 한편 고맙고, 대견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제가 물렁이를 혼낸 것은 담배 한 개비를 잘라 놓은 짓궂은 장난이 아니라 아빠의 폐부를 찌른 것에 대한 뜨끔함 때문이었다고 할까요. 물렁이에게는 정말 미안합니다. 물렁이가 아빠를 생각하는 것만큼 아빠는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으니까요.

이럴 것이 아니라 조속히 금연 계획을 다시 세우고 비장한 각오를 다져야겠습니다. 물렁이에게 손찌검을 한 것과 약속을 지켜내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가슴이 편치 않은 하루를 보냈습니다.

"물렁아 조금만 더 기다려 줘라. 아빠가 꼭 약속 지킬게.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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