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주국방의 열쇠는 '군축'에 있다

[전환기의 한미동맹(하)] 군축의 역설

등록 2004.06.03 10:52수정 2004.06.0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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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 재조정을 계기로 새로운 안보 환경을 맞이하고 있는 한국의 처지는 한마디로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주한미군의 안정적인 주둔과 한미동맹의 유지·강화를 위해서는 미국의 요구 사항을 적지 않게 수용해야 하는데, 이것이 몰고 올 파장이 만만치 않다.

미국의 요구사항 목록에는 용산기지를 비롯한 주한미군 재배치 비용의 한국 부담, 한미동맹의 '지역적 역할' 강화, 한국의 방어작전에서 한국군의 역할 확대, 미사일방어체제(MD) 참여 등이 있다.

그러나 미군기지 이전비용 부담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강하고 이전 후보지역으로 확정된 평택 주민들의 반발은 날로 커지고 있다. 또한 명확한 제한 규정을 두지 않고 한미동맹의 지역적 역할을 강화할 경우 한국이 불필요한 지역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적으로 만드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특히 한국의 MD 참여 여부는 미래의 동북아에서 한국의 전략적 입지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곤혹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경우, 한미동맹의 불안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아 한국의 '딜레마'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가 들고 나온 것이 '협력적 자주국방'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협력적 자주국방은 '독립된 개념'이 아니라 '주한미군의 변형'과 함께 한미동맹 현대화의 두 축을 이루고 있기에, 이를 통해 한국의 자주성이 증진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다. 더구나 군비증강에 기반을 둔 협력적 자주국방은 '돈 먹는 하마'가 될 것이기 때문에, 민생과 경제를 살리는데 필요한 예산을 상당 부분 잠식하고 말 것이다.

특히 '한미동맹의 현대화'의 맥락에서 주한미군은 육군의 비중을 줄이고 해공군력과 정보력을 강화하고 한국군이 미 육군의 역할을 대체할 경우, 육군의 비대화와 이에 따른 기형적인 군구조의 고착화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이는 군사력 구조에 있어서 미국으로의 종속 심화와 주변 강대국을 상대로 한 최소한의 자위력 건설 노선에도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미동맹이 대규모로 군비증강에 나서고 이에 따라 미국의 대북한 선제공격 능력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대적 과제로 일컬어지고 있는 북한과의 군사적 적대 관계 청산 및 군비축소, 그리고 평화협정 체결 전망은 더욱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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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근본적인' 변화 조짐들


이와 같이 '주한미군 변형'과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 '한미동맹의 현대화'가 새로운 딜레마를 잉태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 특히 군사적 대치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강화된 미국의 '일방주의'와 한국의 오랜 관성인 '자발적 대미 종속성'도 중요한 요인이지만, 북한과의 군사적 대결 구조는 한미동맹 재조정에 있어서 한국의 협상력을 저하시키는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여전히 100만 대군을 유지하면서 이 가운데 70%를 휴전선 인근으로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막강한 장사정포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한미연합전력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무기 등 이른바 '비대칭전력' 확보에 나서고 있는 현실에서, 대북 억제력의 중추적 역할을 해온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리의 입장을 관철시키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는 반대로 북한의 군사력을 '덜' 위협적인 것으로 만들고 군사적 신뢰관계를 넓히면서 군축과 평화체제를 이뤄내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해나가면 한국의 대미 협상력도 크게 신장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커져가고 있는 안보 딜레마를 해소하고 대등하고 건전한 한미관계를 열어가며 동북아에서 우리의 위상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열쇠는 바로 남북관계에 있다.

물론 미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크고 위협 인식의 대상이 다른 한반도의 현실에서 군사·안보문제를 남북한 주도로 풀어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남한은 북한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위협 인식의 비대칭성'은 한반도 군사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어렵게 하는 구조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남한이 미국을 대신해서 북한의 안전보장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은 남북한 주도의 군사문제 해결의 가장 큰 장애요인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변화의 바람도 불어오고 있다. 이른바 '근본문제'라고 일컬어져왔던 주한미군과 평화협정 체결 그리고 군축 문제에 있어서 북한의 근본적인 태도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북한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면서 한반도의 대전환을 꾀할 수 있는 근거들은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정치외교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일컫는 것도 이러한 기회를 살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먼저 주한미군의 주둔 문제와 관련해 북한은 1990년대 초부터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해왔다. 이러한 입장은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해 9월 북한의 조명록 차수의 워싱턴 방문, 그리고 핵파문을 몰고 온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의 평양 방문 때도 확인되었다.

또한 평화협정 체결과 관련해서도 기존의 입장을 바꿔, 남한도 협정체결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 변화는 한반도의 불안한 정전상태를 종식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군축 문제와 관련해서도 북한이 직간접적으로 군축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북한이 군사력을 밀집시킨 개성 일대를 '공단화'하면서 군사력을 후방으로 이동시킨 것이나 남한과의 장성급 회담을 수용한 것은 군사문제에 대한 북한의 변화된 시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북한이 이미 병력 감축에 돌입했다는 관측과 핵 억제력을 언급하면서 "그 누구를 위협 공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망적으로 재래식무기를 축소하며 인적자원과 자금을 경제건설과 인민생활에 돌리려는 데 있다"고 주장한 것은 군축문제에 있어서도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유력한 근거로 해석되고 있다.

군축이 자주성을 증진시킨다는 시대적 역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와 같은 북한의 근본적인 변화의 조짐은 확인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전통적인 정치공세의 일환일 수도 있고, 반면에 체제생존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유연성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는 특사 파견 등을 통해 북한의 진위와 협상 의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핵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남북관계의 급진전은 어렵다"는 기존의 경직된 틀에서 벗어나,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도 북한과의 대타협의 소지들이 있는지 면밀한 검토와 남북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게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는 '협력적 자주국방'과 '주한미군 변형'을 두 축으로 하는 한미동맹 현대화보다는 '군축'이 자주성을 증진시키고 안보를 튼튼히 하는 핵심적인 전략이라는 데에 있다.

북한을 포함해 한반도에서 군축을 단행하겠다는 것은, 그동안 세계에서 가장 군사적 밀집도가 높고 군사적 경계태세가 강하다는 이유로 관철되어온 미국의 과도한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축소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반대로 이미 넘칠 만큼 군사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남한에 의해서든 북한에 의해서든 군사력이 추가로 강화되는 것은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지독한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면 진정한 자주국방도 공고한 평화체제의 구축도 정치적 구호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반도가 군축을 한다는 것은 "우리만 무장해제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대대적인 양적인 군축과 부분적인 질적 군비증강이 어우러질 때, 주변 강대국을 상대로 한 '최소한의 자위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숨통을 틀 수 있는 것이다.

군축은 평화체제 시대의 자주성 증진에도 큰 의의가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관련해 가장 중대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남북한 양측의 엄청난 군사력을 어떻게 관리해 우발적인 충돌을 방지하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대단히 역설적으로 평화체제 관리 국면에서 남북한 양측의 과도한 군사력은 미국 등 주변 국가들의 개입 수준과 무장 수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에 군사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평화체제는 불안한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평화체제의 안정적인 관리를 명분으로 미국 등 주변국가들은 개입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도 '자위'를 명분으로 중무장한 상태로 말이다. 미국이 평화체제의 관리자로 나서려고 할 경우 중국과 러시아도 개입하려고 할 것이고, 일본 역시 자신의 지분을 요구하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평화체제 시대의 한반도가 강대국의 각축장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평화협정 체결을 앞당기고 평화체제의 안정성과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협력적 자주국방'을 비롯한 '군비증강'에 의존하는 한미동맹 현대화는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국방'뿐만 아니라 '평화체제 구축 및 관리'에 있어서도, '자주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도 한반도 군축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금 한반도는 분명 중대한 갈림길에 들어서고 있다. 길을 잘못 들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방향을 잘 잡으면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21세기를 열어갈 수도 있다. 불안과 기대, 기회와 도전이 공존하고 있는 이 시대에,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주한미군의 감축을 또 다른 군사력으로 메우겠다는 어설픈 자주국방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한반도 군축과 평화체제 구축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하는 데에 있다. 이를 통해서만 진정한 자주국방과 평화체제 구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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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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