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75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6.04 10:00수정 2004.06.0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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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군님은 기마병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제후가 불쑥 에인의 기마병을 들먹였다.
"우린 기마병이 아닌 파견병이지요."

에인은 제후의 말이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싶어 그렇게 못박아버렸다. 그럼에도 제후는 계속해서 자기 생각을 펼쳤다.
"그러나 장군께서는 본국에 더 요청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기마병 3백과 보병 수천만 있다면 시파르나 키쉬 같은 도시는 간단하게 손에 넣으실 수도 있으실 텐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에인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 여행을 주선한 목적이 점령지를 답사하라, 그것이었다? 에인이 속으로 고개를 젓고 있는데 제후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물어댔다.

"그곳들을 돌아보면서 그런 생각은 아니 드셨습니까?"
"아니요,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각자 모두 자기 나름으로 잘 살고 있고 또 우리 소호 국에서도 필요하지 않는데…."

제후가 재빨리 그의 말꼬리를 잡아챘다.
"어느 나라든 영토를 넓히는 것이 지상과제인데 어찌 소호 국에서는 필요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땅도 백성도 충분합니다. 우리의 현명한 왕들께서는 늘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쓸데없이 영토가 많으면 백성과 군사가 고달프고 게으른 백성이 많으면 왕이 고달프다구요."
"그러나 딜문의 경우는 그와 다르지요. 딜문이 언제까지나 저런 식으로 힘없는 제후국으로 남는다면 머잖아 존재 자체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건 당신 사정이지요, 라고 에인이 속 대답을 하는데 제후가 덧붙였다.
"하지만 이참에 영토를 넓히고 큰 도시 하나쯤 차지한다면 우리 환족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거대 민족으로 이곳에서도 영원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에인이 가로질러 물어보았다. 제후가 고개를 바짝 들이밀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장군께서 딱 한번만 더 전쟁을 치러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당치도 않을 소리! 에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건 아니 될 일입니다!"
"장군님, 그렇게 역정만 내실 일이 아닙니다. 이건 민족의 영욕이 걸린 문제이니 부디 한번만 더 용기를 내주십시오."
민족이라고? 딜문의 영욕이겠지! 에인은 벌떡 일어나며 일갈했다.
"그 얘긴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에인은 천둥이를 불러 등에 올랐다. 제후가 애원하듯 불러댔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않고 달렸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에게 여행을 주선한 것도, 도시 순례를 하면서 환족들을 만나게 한 것도 침략 의지를 부추기려는 제후의 은밀한 계산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런 침략을 해야 하는가? 딜문의 5백 인구를 위해 아무 죄도 없고 평화롭게 잘살고 있는 수천, 수만의 생명을 짓밟아야 한단 말인가?'

그는 그간의 경위들을 떠올려보았다. 전령으로 갔던 안내선인이 돌아온 것은 강장수가 떠난 보름 후였다. 선인이 문을 들어섰을 때 이젠 철수할 수 있다, 돌아갈 수 있다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한데 전령이 내민 명령은'차후 연락이 갈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라'는 것이었다. 그는 실망했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대기하라는 말은 불시에 명령이 내려온다는 뜻으로 풀이했고 그래서 명령이 닿으면 그 즉시 떠날 수 있도록 자리에 들 때조차도 옷을 벗지 않았다. 그 겨울 내내 눈비는 왜 그렇게나 자주 내리던지. 낙숫물이 좍좍 흘러내리는 소리조차 전령이 달려오는 말발굽소리로 들려 그는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한데 그가 기다리던 전령은 말을 타고 오지 않았다. 짐을 잔뜩 실은 낙타를 끌고 와서 전해준 서한은'계속 주둔해 있을 것과 그 동안 딜문에도 군사를 양성해서 훈련을 시키라'는 것이었다. 그 명령은 강도가 센 낙뢰였다. 살과 피가 타는 듯했고 입과 코에서는 뜨거운 불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그 불길을 꺼보려고 강과 들과 산으로 미친 듯이 뛰어다녔으나 그 무엇도 그의 타는 마음을 가라앉혀주지 못했다. 탈출이다, 탈출! 내 몸이 딜문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는 천둥이를 몰았고 또 소리쳤다. 가자, 소호로! 우리만이라도 가자! 하지만 녀석은 언제나 베히스툰 그 돌산에서 그만 되돌아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녀석이 그를 내려놓은 곳은 봄이 시작되는 그 들녘이었다.

하지만 그 봄이란 것도 얼마나 잔인했던가. 누리는 새 생명들의 축제장, 태어난 것들이여 오라, 오늘 태어난 너도 어서 오라고 서로 노래로 불러대면서도 에인에겐 그만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하늘을 향해서만 잎을 여는 그 종려나무조차 거만하게 곤댓짓을 했다.

'너 왜 여기에 있니? 여긴 네 장소가 아니야!'
하늘과 바람은 더 심한 말로 재촉했다.
'너의 봄은 여기에 없다, 어서 떠나라!'

기실은 떠날 조건도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딜문의 모든 것들은 그를 괴롭혀댔다. 그는 들에도, 강에도 나가지 않았다. 딜문의 자연은 이제 쓴물이 났다. 문득문득 가슴에서 불 바람이 일 때면 그는 토성을 끼고 걷기만 했다.

두두가 천둥이를 데리고 그를 마중 나온 것은 비가 내리던 저녁이었다. 두두는 그의 앞에 우뚝 멈추어 섰고 그리고는 곧장 원숭이 흉내부터 내었다. 그 모습은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한손으로는 입귀를 당겨 내리고 또 한 손으로는 열심히 뒤통수를 긁어대도 그 얼굴에 빗물이 흘러내린 탓인지 오히려 처량해보였다. 에인이 웃지도 않고 쳐다보기만 하자 두두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장군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어요? 말씀해주세요. 그럼 제가 다 연구를 할 수 있어요?"
"니가 왜 나를 기쁘게 하겠다는 게냐?"
"장군님은 제 영웅이시니까요."

두두는 그렇게 다가왔다. 제후의 장자라 멀리했는데 녀석은 생각보다 순진하고 마음이 깊었다. 천리마가 생겼을 때도 먼저 에인 앞에 끌고 와서 자랑을 했다.
'그렇구나, 두두에게도 천리마가 있다. 제후가 곧 따라올지도 모른다!'

그는 마음이 급해져서 천둥이를 더욱 세차게 몰았다. 그대로 곧장 달린다면 새벽까지는 딜문에 도착할 수 있다. 도착 즉시 군사들을 기상시킨다면 조반 후엔 곧 철수 길에 오를 수 있다. 천둥아, 빨리 가자. 제후가 도착하기 전에, 그가 도착해서 우리를 가로막기 전에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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