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있었던 순천 ㄱ 고교 김길희 교사의 1인 피켓 시위안준철
해마다 담임을 맡게 되면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이 아이들과의 대화입니다. '3월에 꽉 잡았다가 나중에 서서히 풀어 주라'는 고참교사의 '불변의 담임 비법'에 귀가 솔깃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채 학기초부터 대화가 단절된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학생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내 마음이 여려지고 맙니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을 꽉 잡기는커녕 오히려 학생들 앞에서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고 서약까지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아이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특히 학기 초 보충·자율학습 문제로 반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다보면 학교에서 학생들과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깊은 회의감에 빠질 때도 종종 있습니다.
"선생님 저 야자(야간자율학습) 안 하면 안 돼요?"
"대학에 가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무슨 소리야."
"솔직히 애들 떠들기만 하고 공부도 안 해요."
"그럼 너라도 열심히 해야지."
"전 집에서 해야 공부가 잘 되는데요."
"그건 습관들이기 나름이야."
대화라기보다는 억지에 가까운 말로 아이를 타일러(?) 돌려보내고 나면 어딘지 뒤가 허전합니다. 아이들 앞에서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고 선언까지 한 담임으로서 그 약속을 지킬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나기까지 합니다. 올해는 담임을 맡지 않아 아이들과 그런 실랑이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떳떳한지 모릅니다.
한 해 담임을 맡아 아이들 때문에 신경을 쓰고, 아파하고, 때로는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입맛을 잃어버릴 때도 있지만, 그것이 아이들의 바른 성장을 위해서 밭에 뿌려지는 거름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 교사로서 당연히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수고를 강요하는데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실업계라 그런지 전체 학생이 다 보충·자율학습에 참여해야 하는 인문계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지난해는 특기적성이든 야간자율학습이든 정말 희망하는 학생들만 명단을 올렸는데도 별 탈 없이 지나갔습니다. 특히 야간 자율학습을 희망하는 학생이 3명에 불과했지만 그 일로 교장실에 불려간 일은 없었습니다. 만약 인문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안 선생,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예?"
"자율학습 희망자가 3명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냔 말이요?"
"3명 밖에 신청을 안 했는데요."
"뭐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자율학습은 희망자에 한해서 하게 되어 있어서 강요할 수도 없고 해서…."
"허허. 그런 식으로 학급을 관리하니까 늘 그 모양이 아니오?"
보충자율학습은 희망자에 한하여 실시한다는 상급 관청의 지침을 성실히 이행했으면서도 학급 관리를 잘 못하는 무능교사 취급을 받고 교장실을 나온 교사의 자괴감은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더욱 커지기 마련입니다. 한때나마 전체 학생이 강제로 보충수업을 받아야 했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면 교실에서의 상황이 쉽게 그려집니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 우리 야자 안 해도 돼요?"
"아무래도 안되겠다. 다른 반은 거의 100%인데 우리 반만 3명이라서…."
"그러니까 제가 꿈 깨시라고 했잖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공부하도록 해라."
"선생님, 전 야자 죽어도 안 합니다. 정말 강제로 하라고 하면 교육청에 고발할 겁니다."
"허허, 이 녀석…."
교사 입장에서 보자면 참 딱한 풍경이지만 그래도 이런 교실은 희망이 있습니다. 버릇이 좀 없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펄펄 살아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아이들의 불만을 정당한 의견으로 받아들이고자 애쓰는 교사가 있는 한 언젠가는 학교 환경이 개선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학교의 주인인 아이들은 기가 팍 죽어 있고 학생들이 없으면 존재할 이유조차 없는 교사 혼자서만 날뛰는 교실이 문제입니다. 가령, 이런 풍경이겠지요.
"내일까지 보충자율학습 희망원에 도장을 찍어와라."
"선생님, 희망하지 않는 학생은 도장 안 찍어와도 됩니까?"
"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도장이나 찍어와."
"선생님, 전 태권도 도장에 나가야 하는데요."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면 대학갈 준비를 해야지 무슨 태권도야."
"저 태권도로 대학갈 건데요."
"허허 말이 많네. 까라면 까지."
지난 3일과 4일 순천 몇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0교시와 강제 보충자율학습 폐지를 위한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것을 보며 만약 지금 이 시대에 고등학생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어쩌면 문제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새벽 같이 일어나 밤 10시가 넘도록 딱딱한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해야한다는 사실보다는, 무려 3년 동안이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가 불가능하고 자기 의견이나 생각, 혹은 감정을 자유롭게 말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억압된 공간 속에서 생활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저로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문학모임에서 만난 선배 문인이 저를 보자 뭔가 궁금한 표정을 짓더니 다짜고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안 선생도 전교조지요? 내 친구가 모 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는데 날 만나기만 하면 전교조 욕을 그렇게 해요. 전교조가 그렇게 문제가 많나요?"
그 물음에 저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난감했습니다. 전교조 교사라고 다 옳거나 훌륭한 것은 아닐 테고, 그분의 친구인 교장 선생님이 당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같은 조합원이라고 무조건 옹호할 일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학교장과 전교조 교사 사이에 일어남직한 상황들을 고려해볼 때 대충 짐작이 가는 일이기도 해서 이렇게 좀 장황한 설명을 드린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