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교시수업 폐지' 지침, 반대할 이유 없다

[주장] 자율과 획일화, 또 현실이란 말의 왜곡된 사용에 대해

등록 2004.05.31 01:40수정 2004.06.0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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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공이 어디로 갔지?

공이 어디로 갔지? ⓒ 안준철

학교 체육대회 행사가 있던 날입니다.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 준비를 하고 있다가 한 순간 저도 모르게 텔레비전 속으로 시선이 고정되고 말았습니다. 최근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과의 합의에 의해 일선학교에 내려보낸 '0교시 수업 폐지' 지침에 반발하는 한 교장선생님의 변이 문제였습니다.

"교육부가 학교의 자율권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지침을 내린 것은 부당한 처사입니다. 공부방이 없어서 학교에서 일찍 나와 공부를 해야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침을 내리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마치 과녁에 화살이 꽂히듯 제 귀에 박힌 것은 '자율'과 '획일화'란 단어였습니다. '학교의 자율권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지침을 내린 것'이 부당하다고 강변하는 교장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저는 한 순간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율이라니? 누가 누구의 자율을 억압했다는 거지? 교육부의 0교시 폐지 지침이 학교의 자율권을 무시했다? 그런데 학교의 자율권이 왜 필요하지? 학교에 자율권을 주면 그 자율권으로 학생들의 자율을 억압하기 위해서? 그럼 학교는 누구를 위해 있는 거지?'

교장선생님께서 공부방이 없는 아이들을 걱정하는 대목에서는 그 동안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정상화를 위해 0교시 수업 폐지를 소망해온 저로서는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무슨 큰 죄를 지은 기분조차 들었습니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혼란은 안개처럼 가시고 이런 분명한 생각이 찾아왔지요.

a 나는 달리고 싶다

나는 달리고 싶다 ⓒ 안준철

'공부방이 없는 아이들을 배려할 생각이라면 그들을 위해서 학교를 조금 일찍 개방하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런데 공부방이 있는 아이들까지 밥을 못 먹게 하고 (대구지역에서는 0교시 폐지 이후 아침밥을 먹고 오는 학생이 49% 늘어난 것으로 나타남) 학교에 일찍 나오도록 강요하는 것이 바로 획일적인 처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거기에 법으로 금한 돈까지 받아내고 있는데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니?'

그날 텔레비전에는 상급관청의 0교시수업 폐지 지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또 한 사람의 대담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요지는 '대학진학이 목표인 인문고에서 대학진학이라는 현실을 무시한 채 원칙만 강요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번 과녁에 꽂힌 화살처럼 제 귀에 박힌 것은 '현실'이란 단어였습니다. 처음 듣는 말도 말이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왜 그랬는지 불쑥 화가 치밀었습니다.

'현실이라니? 현실이 뭔데? 아이들이 대학에 가는 것만이 현실이야? 한참 성장해야할 나이에 0교시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아침도 거른 채 학교에 나오다 보면 위장이 나빠지고 하루 종일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어 척추가 휜 아이들도 많은데 그것은 현실이 아니고 뭐야?

고교시절 타율과 억압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정작 대학생이 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자유가 아닌 방종으로 학문에 바쳐야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고 이상이야?'


<나는 한국의 아름다운 왕따이고 싶다>라는 책에는 저자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지식들이 얼마나 쓸모가 없었는지를 증언(?)하는 대목들이 낱낱이 소개됩니다. 우리 교육의 슬픈 현주소를 소름이 끼치도록 확인시켜준 이 책의 저자는 부정과 관행으로 얼룩진 한국 기업의 풍토 속에서 바위에 계란던지기 식의 원칙과 정직을 고수하면서 끝내는 성공하는 여성 기업인으로 살아남습니다.

a 응원상은 우리 차지

응원상은 우리 차지 ⓒ 안준철

그 후 외국에 진출하여 유수한 기업들과 경쟁하면서 그가 극복하기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국, 혹은 한국 기업의 부정적인 이미지였습니다. 그가 만난 외국인들에게 비친 한국은 원칙과 정직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미개한 나라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다국적 기업의 한국 지점장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한국은 조금만 힘을 가하거나 뇌물을 주면 가진 자들부터 너무나 쉽게 굴복시킬 수 있는 나라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심각한 것은 이런 현실을 개선하려는 구체적인 노력들이 교육계나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도덕 시간에 배운 지식은 시험성적을 올리는데만 사용될뿐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쯤은 가볍게 취급해버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 국민교육의 수준입니다.

희망하는 학생들만 하도록 되어 있는 보충자율학습은 강타(강제 타율학습의 준말)라는 말이 잘 대변하고 있듯이 학생들의 희망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자신의 의사를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고 강한 자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여야만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되는 구조 속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장차 진실하고 용기 있는 인간이 되어달라는 주문은 그야말로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할 것입니다.

'대학진학이라는 현실을 무시한 채 원칙만 강요할 수는 없지 않느냐' 라는 말속에는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오로지 대학진학만을 현실로 인정하는 가공할만한 무지가 담겨 있습니다. 학교가 원칙과 정도를 무시하거나 인간교육을 외면함으로써 멀지 않은 미래에 '조금만 힘을 가하거나 뇌물을 주면 너무도 쉽게 굴복하는' 나약하고 비굴한 인간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손실인지 알지 못한 탓이지요.

저는 시골에서 대부분의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체육시간에 공을 차고 음악 시간에 노래를 부르고 미술 시간에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론 수업도 했지만 실기를 주로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6학년 2학기가 되어 도회지 학교로 전학을 왔는데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때까지 예능과목 시간에 실기수업을 해본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체육시간에도 공을 차는 대신 이론수업만 하고, 음악시간에도 노래는 부르지 않고 콩나물대가리만 헤아리고, 미술시간에도 그리기 대신 시험문제만 열심히 풀었습니다. 동무들과 함께 공을 차고, 화음을 맞추어 노래부르고, 자연을 화폭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골학교의 초등학교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쯤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아찔해질 뿐입니다.

a 오늘은 내가 영웅

오늘은 내가 영웅 ⓒ 안준철

돌이켜보면 입시위주 교육에 얽매어 있었던 초등학교 기간이 그나마 짧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의 영향 때문인지 운동(주로 걷기)을 좋아하고, 노래부르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그림에는 소질이 부족하여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남이 그려놓은 훌륭한 그림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끼곤 합니다. 행복감은 현실적인 감정입니다.

방학이면 하루에 학원을 여덟 군데나 다닌다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아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부모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부모로서 어쩌면 자식을 그렇게 혹사할 마음이 생길까 하는 궁금증도 함께 일었습니다. 아마도 내 자식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도 해보기도 합니다. 혹시 아이의 부모가 공부가 아닌 다른 것, 가령 동무들을 만난다든지, 보고 싶은 책을 본다든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바람에 나부끼는 정원의 나뭇잎을 바라본다든지 하는 것들이 아이의 바른 자람을 위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거라고.

불행하게도 아이의 부모는 공부만이 아이에게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은 결코 아니지만,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소박한 일상에서의 행복을 느끼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고, 특히 어린 시절의 감수성이란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말기 때문입니다.

요즘 모처럼 학교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거르고 8시까지 등교하던 아이들이 아침을 맛있게 먹고 해맑은 얼굴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옆 학교의 눈치를 보거나, 0교시 수업이 폐지되면 보충수업 시간이 줄어 행여 수입이 줄어들까 조바심하는 교사들도 있다는 쓸쓸한 얘기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정말 풍문이길 바라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교장선생님들이 머리를 맞대고 0교시 수업 폐지를 받아들이는 대신 아침 8시 30분에 1교시를 시작하여 점심시간을 줄이고 오후 6시까지 보충 수업 2시간을 포함한 9교시 수업을 할 수 있도록 시간조정을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결국 수익자 부담원칙으로 하는 보충수업 시간을 줄이지 않으려는 의도이겠지요.

교육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만 일방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도 되겠지만, 한 가지 변할 수 없는 진리는 학교의 존재이유는 아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원하지도 않고,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는데 아이들의 건강과 인권을 침해하면서까지 보충자율학습을 강행하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이제 학교는 미래의 꿈나무들인 우리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함께 커가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자유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구호만 무성한 인성교육이 아니라 진정으로 아이들을 생각하고 함께 방법을 고민해가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재미있고 사랑이 넘치는 살아있는 학교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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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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