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일 월드컵과 식민주의 사관

[태우의 뷰파인더 30] 이제 더 이상 '익숙한 패배감은 없다'

등록 2004.06.08 14:23수정 2004.06.0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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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터키와의 평가전을 지켜보면서 2년 전 여름의 함성과 열기를 떠올렸다. 두 눈을 감으면 온 국민이 붉은 악마가 되어 목청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친던 그 때의 흥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황새 황선홍의 월드컵 첫 골을 시작으로, 반지의 제왕 안정환의 헤딩슛, 고구마 박지성의 4번의 볼터치에 이은 환상의 골과 귀여운 골 세레모니, 설바우도 설기현의 벼락 같은 동점골, 최고의 리베로 홍명보의 승부차기 결정골과 해맑은 미소… 도저히 측량 불가능한 환희와 감동의 순간이 그 여름 대한민국에 있었다.

어릴 적 나는 모두 다 잠든 새벽에 혼자 거실에 앉아 월드컵 경기를 보아야 했다. 아버지는 직업상 해외에 나가 계셨고, 엄마와 누나들은 축구랑 아무 상관이 없는 인생들이었다. 나는 16강이 좌절될 때마다 가슴을 치며 속상해 했다. 혼자 경기를 보고 난 새벽에 잠자리에 누우면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패배의 안타까움에 나는 홀로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그러는 사이 나는 조금씩 '패배의 아픔'에 익숙해져 갔다. 기대를 많이 할수록 실망도 컸기 때문에 나는 조금씩 기대의 폭을 줄이고, 알맞게 비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려는 쪽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패배감은 잘 길들인 구두처럼 내 정신의 발에 알맞은 사이즈가 되었다.

2년이 흐른 지금 그 여름이 내게 선사한 의미를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긴다. 그건 익숙해진 패배감의 구두따윈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라는 가르침이었다. 한 개인의 삶에서도, 한 사회, 나아가 한 국가에서도 익숙한 패배감은 당연히 끝나야 한다.

역사를 기술할 때 역사 사건이 어떠했는지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보다 어떤 역사 관점으로 기록하는지는 더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건을 기록할 때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학자의 관점, 즉 사관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2002년 6월 25일 한국과 독일 월드컵 4강전 당시 거리 응원 현장
2002년 6월 25일 한국과 독일 월드컵 4강전 당시 거리 응원 현장오마이뉴스 권우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 역사는 20세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20세기에 역사를 처음 기술할 때 일본의 식민지였다. 한국의 역사는 일제의 어용 단체인 조선사 편수회가 기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한국 역사학자의 사관 속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식민주의 사관이 스며들게 되었다.

식민주의 사관의 핵심은 조선 민족은 안으로는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하고, 밖으로는 중국과 같은 강대국에 사대하는 족속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식민주의 사관의 목적은 조선 민족에게 패배감을 주입시키고, 일제가 지배하기 편하도록 열등감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제 36년의 역사는 해방과 함께 종식되었지만, 한번 주입된 관념은 잡초처럼 무서운 생명력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렸다.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스스로 폄하하거나 모독하는 발언을 나는 종종 들었다. 그리고 때때로 이러한 발언의 대상은 축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발언은 축구 선진국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한국 유소년 축구 교육의 질과 잔디 구장의 보유 여부, 축구 행정 수준의 차이, 리그 활성화 정도에 따른 실전 경기의 횟수 등을 완전히 무시한 감정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감정은 강력했다.

2002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우리는 적어도 축구에서 어느 정도 패배에 익숙해 있었다. 나 역시 새벽의 뒤척임 속에서 감정적으로 축구에 관한 한 한국은 열등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3명의 대표팀 선수들은 나의 생각에 일침을 가했다. 그리고 24번째 대표팀 선수인 붉은 악마는 도무지 패배감이라고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외치고 또 외쳤다. 우리는 분열하지도 않았고, 그 어떠한 팀에게도 기죽지 않았다. 녹색의 잔디 위를 힘차게 내달리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내 의식 속에 있던 익숙한 패배감의 잡초를 뿌리 채 뽑아버렸다.

전후 세대인 우리 아버지들은 가난 속에서 미국 짚차를 쫓아가며 "기브미 껌, 기브미 초콜릿"을 외쳤고 미국 부대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 '부대찌개'를 만들었다. 그들은 놀라운 정열과 노력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지만, 그들 마음 속 깊은 곳엔 가난과 눈물로 얼룩진 열등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패배를 모르는, 승리만을 믿는 세대가 출현했다. 껌과 초콜릿을 얻어 먹지 않은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비록 진다고 하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필드에 첫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의 발을 옥죄던 동남 아시아의 작은 반도국가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크고 원대한 비전으로 승부를 해야 한다. '익숙한 패배감'을 불 사르고 승리를 믿어야 한다.

누군가는 축구와 히딩크 신드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고, 누군가는 붉은 물결을 보며 레드콤플렉스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던 2002 한일 월드컵은 내 가슴에 '익숙한 패배감'과의 이별 의식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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