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탈곡하던 70년대 후반까지의 탈곡기가 어느 민박집 앞에 놓여 있다.김규환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은 일- 2모작 농사와 힘 한번 써보는 남정네들
내가 본 70년대는 참 바뻤다. 남부 지방 논밭 중 80% 이상이 보리와 밀로 채워졌으니 망종 무렵 일주일 이내에 베어내고 주로 공터와 논두렁에 주르르 쌓아둔다. 보리와 밀은 이제 관심사가 아니다. 얼른 물을 잡아 논을 갈고 모를 쪄서 나르고 모내기를 해야 한다. 지금처럼 일이 적절히 분산되지도 않았으니 밤새 제 논에 물대기를 하려면 죽기 살기로 덤벼야 간신히 해치울 수 있었다.
그 시절의 2모작이 더 힘들었던 것은 못자리를 만들 즈음부터 밭작물 씨앗을 뿌리고 나물 캐기, 고사리 꺾기, 보리밭 매기, 모판 피사리를 하고 보리를 베어 놓고 삼 껍질을 벗기든가 칡껍질을 벗기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 모내기를 위한 준비로 들어갔다. 품앗이로 모내기를 해내야 하니 2달여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농사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니 까딱 잘못했다가는 농사를 망치기도 했다.
물이라도 풍부했으면 다행이련만 하늘을 보고 농사 짓는 천수답(天水畓) 일색이었기에 사람 맘 같지 않았다. 가뭄에 사람 먹을 물도 바짝 말라가는 6월 초중순 경에는 논밭이 쫙쫙 갈라지고 물을 대 봤자 푸석푸석 먼지만 날릴 뿐 땅속으로 스며들기 일쑤였다. 기우제가 성행했던 그 땐 차라리 사람 목이 타고 사람이 배고파 죽어가는 엄중한 시절이었다.
간신히 모내기를 마쳤으면 다행이었다. 6월 중순인데도 아직도 들판은 20% 가량은 텅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비! 비! 비!” 하거나 “물!”하면서 애타게 단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다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들녘 곳곳엔 간혹 내리는 비와 논에서 넘쳐 스며든 물이 보릿대를 눌러 놓은 바닥에 스며들어 보리 싹이 파릇파릇 나고 있었다. 그건 논갈이 때 써레질을 하는 동안 넘쳐흐른 물 때문이다.
짚으로 간신히 얹어 놓은 우지뱅이를 타고 물이 흘러내리면 어쩔 땐 절반이 썩는 경우도 있었다. 누구 집이고 보리를 먼저 타작하는 일은 없었기에 더욱 손실은 컸다. 뿐만이 아니다. 들쥐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거의 2모작이 끝나갈 무렵 산 다랭이 논에 식구끼리 흔들모를 할 때까지는 아녀자들 몫이 더 크다. 그 때를 지나면 한량이나 다름없던 남정네들이 힘 한번 써 보는 시기가 다가온다.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 두 분은 왕복 70리 곡성 옥과장까지 지게를 지고 가셨다고 한다. 가는 길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오는 길엔 200리터가 넘는 둥그런 드럼통을 밧줄로 묶어 셋이서 간신히 일으켜 세워 한 사람은 지고 둘은 밀어줘서 뒤뚱뒤뚱 다리가 후들거리며 출발한다. 번갈아가며 걷고 또 걸어서 오르막 고갯길을 넘어 마을에 도착하고 보면 하루가 꼬박 갔다고 한다.
자동차도 없던 때니 경운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도 없었다. 달구지를 끌고 가면 좋으련만 어찌 그리 힘자랑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갔다 온 사람들은 다리뿐만이 아니라 온 몸이 멍투성이였다. 며칠이고 드러누워야 하는 초죽음 상태가 되지만 때가 때인지라 바로 털고 일어나 타맥에 합류하게 된다.
끙끙 앓으며 달구지에 발동기와 타맥기를 실어 날라 설치 타작 준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