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터를 닦고 보리 타작 하오리라

보리타작 풍경<1>보리타작의 역사와 준비작업

등록 2004.06.10 19:01수정 2004.06.10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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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0년대 보리베던 풍경
6, 70년대 보리베던 풍경전남농업박물관
타작의 역사


이제는 보리가 들판을 가득 채우지 않으며 또한 주식(主食)도 아니다. 한때 남도 초여름 들녘을 황금으로 물들였던 보리. 그 시절엔 보리가 요즘 쌀 같았다. 보리가 익을 때면 눈물이 찔끔 흘러나오는 건 또 무슨 심사란 말인가.

보리 타작을 타맥(打麥)이라 한다. 타작이라면 베어낸 작물을 도리깨나 방망이, 나뭇가지로 두들겨 알곡을 수확하는 것인데 탈곡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하지만 '타작'은 주로 두들겨서 하는 것이고 '탈곡'은 가을철 벼를 탈곡기에 넣어 하는 것이니 어감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농사가 그저 그런 일로 전락한 후로는 그런 말을 일상에서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보리 타작을 어떻게 했을까? 선사 시대엔 이삭을 돌칼로 땄을 게고 그 이후론 널찍한 마당에 얇게 펼쳐 놓고 두들겨서 보리 알갱이를 분리해 냈다. 그 다음이 개상이나 쇠 빗 같은 홀테인데 홀테는 벼를 훑는 데 쓰였다.

여기서 다룰 6~70년식 타작은 발동기(發動機)에 벨트를 연결하여 훅 불어 주는 타작이다. 경운기에 연결하던 시대가 잠시였고 십수년 흘러 요즘에는 콤바인에 사람이 타고 보리밭을 지나가기만 하면 보릿대는 잘게 부서지고 가마니에 보리가 탈곡이 되어 톡톡 쏟아진다.

정다산 부자가 그린 보리타작


개상으로 그냥 두들겼던 시대의 타작
개상으로 그냥 두들겼던 시대의 타작김규환
新芻濁酒如潼白(신추탁주여동백)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뿌옇고
大碗麥飯高一尺(대완맥반고일척) 큰 사발에 보리밥 높기가 한 자로세
飯罷取枷登場立(반파취가등장립) 밥 먹자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雙肩漆澤飜日赤(쌍견칠택번일적) 검게 탄 두 어깨 햇볕 받아 번쩍이네.
呼邪作聲擧趾齊(호사작성거지제) 옹헤야 소리 내며 발맞추어 두들기니
須臾麥穗都狼藉(수유맥수도랑자) 삽시간에 보리 낟알 온 마당에 가득
雜歌互答聲轉高(잡가호답성전고) 주고받는 노랫가락 점점 높아지는데
但見屋角紛飛麥(단견옥각분비맥) 보이느니 지붕 위에 보리티끌뿐이로다
觀其氣色樂莫樂(관기기색낙막락) 그 기색 살펴보니 즐겁기 짝이 없어
了不以心爲刑役(요불이심위형역) 마음이 몸의 노예가 되지 않았네.
樂園樂郊不遠有(낙원낙교불원유)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何苦去作風塵客(하고거작풍진객)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으리오.


<목민심서>를 쓴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보리타작>이다. 그의 아들 정학유(丁學유)는 <농가월령가 5월령>에서 또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오월이라 한여름 되니 망종 하지 절기로세
남쪽 바람 때맞추어 보리 추수 재촉하니
보리밭 터를 닦고 보리타작 하오리라
드는 낫 베어다가 한 단 두 단 헤쳐 놓고
도리깨 마주 서서 흥을 내어 두드리니
불고 쓴 듯하던 집안 갑자기 북적인다.
가마니에 남는 곡식 이제 곧 바닥이더니
중간에 이 곡식으로 입에 풀칠하겠구나.
이 곡식 아니라면 여름 농사 어찌할까
천심을 생각하니 은혜도 끝이 없다
목동은 놀지 말고 농우를 보살펴라
그루갈이 모 심기 제 힘을 빌리리라(以下 생략)


유럽에서 산업 혁명이 한창이던 18세기. 조선과 한말, 일제를 거친 18세기에서 19세기 중반이나 6·25와 경제산업개발과 보릿고개로 이어지는 20세기나 다를 바 없었다. 1970년대 말까지는 평야 지대를 빼곤 보리로 연명하던 보릿고개가 끝나지 않았다. 그도 전국적으로 그 가난을 벗던 시기가 통일벼가 고루 퍼지던 80년대 초반이었으니 얼마나 모진 세월이 이어졌던가.

벼 탈곡하던 70년대 후반까지의 탈곡기가 어느 민박집 앞에 놓여 있다.
벼 탈곡하던 70년대 후반까지의 탈곡기가 어느 민박집 앞에 놓여 있다.김규환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은 일- 2모작 농사와 힘 한번 써보는 남정네들

내가 본 70년대는 참 바뻤다. 남부 지방 논밭 중 80% 이상이 보리와 밀로 채워졌으니 망종 무렵 일주일 이내에 베어내고 주로 공터와 논두렁에 주르르 쌓아둔다. 보리와 밀은 이제 관심사가 아니다. 얼른 물을 잡아 논을 갈고 모를 쪄서 나르고 모내기를 해야 한다. 지금처럼 일이 적절히 분산되지도 않았으니 밤새 제 논에 물대기를 하려면 죽기 살기로 덤벼야 간신히 해치울 수 있었다.

그 시절의 2모작이 더 힘들었던 것은 못자리를 만들 즈음부터 밭작물 씨앗을 뿌리고 나물 캐기, 고사리 꺾기, 보리밭 매기, 모판 피사리를 하고 보리를 베어 놓고 삼 껍질을 벗기든가 칡껍질을 벗기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 모내기를 위한 준비로 들어갔다. 품앗이로 모내기를 해내야 하니 2달여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농사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니 까딱 잘못했다가는 농사를 망치기도 했다.

물이라도 풍부했으면 다행이련만 하늘을 보고 농사 짓는 천수답(天水畓) 일색이었기에 사람 맘 같지 않았다. 가뭄에 사람 먹을 물도 바짝 말라가는 6월 초중순 경에는 논밭이 쫙쫙 갈라지고 물을 대 봤자 푸석푸석 먼지만 날릴 뿐 땅속으로 스며들기 일쑤였다. 기우제가 성행했던 그 땐 차라리 사람 목이 타고 사람이 배고파 죽어가는 엄중한 시절이었다.

간신히 모내기를 마쳤으면 다행이었다. 6월 중순인데도 아직도 들판은 20% 가량은 텅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비! 비! 비!” 하거나 “물!”하면서 애타게 단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다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들녘 곳곳엔 간혹 내리는 비와 논에서 넘쳐 스며든 물이 보릿대를 눌러 놓은 바닥에 스며들어 보리 싹이 파릇파릇 나고 있었다. 그건 논갈이 때 써레질을 하는 동안 넘쳐흐른 물 때문이다.

짚으로 간신히 얹어 놓은 우지뱅이를 타고 물이 흘러내리면 어쩔 땐 절반이 썩는 경우도 있었다. 누구 집이고 보리를 먼저 타작하는 일은 없었기에 더욱 손실은 컸다. 뿐만이 아니다. 들쥐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거의 2모작이 끝나갈 무렵 산 다랭이 논에 식구끼리 흔들모를 할 때까지는 아녀자들 몫이 더 크다. 그 때를 지나면 한량이나 다름없던 남정네들이 힘 한번 써 보는 시기가 다가온다.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 두 분은 왕복 70리 곡성 옥과장까지 지게를 지고 가셨다고 한다. 가는 길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오는 길엔 200리터가 넘는 둥그런 드럼통을 밧줄로 묶어 셋이서 간신히 일으켜 세워 한 사람은 지고 둘은 밀어줘서 뒤뚱뒤뚱 다리가 후들거리며 출발한다. 번갈아가며 걷고 또 걸어서 오르막 고갯길을 넘어 마을에 도착하고 보면 하루가 꼬박 갔다고 한다.

자동차도 없던 때니 경운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도 없었다. 달구지를 끌고 가면 좋으련만 어찌 그리 힘자랑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갔다 온 사람들은 다리뿐만이 아니라 온 몸이 멍투성이였다. 며칠이고 드러누워야 하는 초죽음 상태가 되지만 때가 때인지라 바로 털고 일어나 타맥에 합류하게 된다.

끙끙 앓으며 달구지에 발동기와 타맥기를 실어 날라 설치 타작 준비 끝

1980년대 초반 부터 콤바인으로 낫으로 벨 필요없이 논에서 작업이 끝났다.
1980년대 초반 부터 콤바인으로 낫으로 벨 필요없이 논에서 작업이 끝났다.신안군
그 때는 '구루마'라는 달구지에 의존하여 무거운 짐을 나르던 때라 한 대 있는 발동기를 얻어 타맥을 하려면 새벽부터 동네는 들썩였다. 장마가 언제 올지 모르는 절박한 심정에 춘궁기가 끝나지 않는 생명붙이들이 밥 달라고 하는 터에 하루라도 꼼지락거릴 수도 없었다. 잠깐 해가 반짝이면 후딱 해치우는 게 보리 타작이다.

소 달구지에 먼저 동력이 없는 탈곡기를 하루 이틀 전에 실어다 놓고는 동네 장정 열댓이 지렛대를 이용하여 간신히 기름투성이 발동기를 싣는다. 싣는 데만 두시간 가량이 소요되는 최대 난관이다. 실어 놓으면 기우뚱 자우뚱 달구지가 요동을 치고 갑자기 무거워진 무게에 소가 난동을 부려보지만 옴짝달싹을 못하고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삐거덕 삐거덕” 짐 실은 오래된 달구지가 내려 앉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다.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보리가 눌러진 공터에 도착하여 끙끙 앓듯 발동기를 내려 놓고는 보리 타작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마을 남자 어른들 대부분이 몰려 있다. 집안 식구들 모두 총 동원이다.

어른들은 발동기와 며칠 간 타작을 했던 터라 먼지를 뒤집어 쓴 타맥기를 평평한 곳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자리를 잡는다. 벨트를 걸어 거리를 적당히 재고 쇠말뚝을 가져와 사방팔방에 메로 쳐대느라 쩡쩡 골짜기가 울린다. 다시 나무 작대기로 벨트를 훅 밀어 벗겨 놓고 메질을 해댄다. 한 사람은 냇가에 가서 물을 한 양동이 퍼와 발동기에 붓고 또 한번 떠다가 놓는다.

주인은 이슬이 깨자마자 열댓 마지기를 한꺼번에 쌓아둔 보리더미 위에 올라 일찌감치 마람 이엉을 걷어 바짝 말린다. 짐을 부려둔 소달구지는 다시 동네로 가서 네모진 덕석(멍석)을 대여섯개 싣고 왔다. 먼저 보리가 떨어질 부분에 덕석을 깔고 가장자리 부족한 부분은 허름한 포장이라도 까느라 정신이 없다.

열댓살 된 아들은 지게에 출렁이는 한말짜리 동그란 막걸리 통을 띠꾸리로 단단히 묶어서 지고 내려오고 있다. 음식은 모내기처럼 따로 마련하러 가기 힘드니 미리 준비하여 작업장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상포로 덮어 먼지가 끼지 않게 대기시켜 놓고 있다.

달구지가 운송 수단이었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거늘...짐도 실어 나르고 장도 보러 가고 논과 밭을 갈았다.
달구지가 운송 수단이었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거늘...짐도 실어 나르고 장도 보러 가고 논과 밭을 갈았다.장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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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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