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발동기 소리에 눈치코치로
보리 까시락 뒤집어쓰며 보리타작

보리타작 풍경<2>보리 알갱이가 후두둑 쏟아졌다

등록 2004.06.14 16:22수정 2004.06.1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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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보리타작하는 장면을 구하지 못해 가을추수 장면을 대신 싣습니다. 학생들이 동원된 듯 합니다.
70년대 보리타작하는 장면을 구하지 못해 가을추수 장면을 대신 싣습니다. 학생들이 동원된 듯 합니다.장성군
수확은 즐겁다. 그렇다면 타작은 반드시 즐거울까? 아니다. 보리타작은 그렇게까지 즐겁지 않았다. 말이 타작이지 고역이다. 가시와의 전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온 세상 먼지와 온갖 보리 까시락(까끄라기)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뒤집어쓰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노동 강도는 세상에 둘째가라하면 서럽다. 아이들은 두 세시간 하고 마니 마지못해 하는 것이며 어른들은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니 도리가 없다.


터를 잡고 발동기와 탈곡기 설치를 마친 어른들은 틉진(걸쭉한) 막걸리를 노란 주전자에 콸콸 쏟아 대접에 한 그릇 씩 따라 마셨다. 안주랬자 멸치 볶음과 배추 겉절이다. 아저씨들은 버릇처럼 막걸리를 손으로 휘휘 젓고 젓가락도 없이 손으로 몇 개 주워 먹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꺾어 입에 가져가 "꺼억-" 소리를 내며 드신다.

"자, 한판 해보더라고!"
"점때 지나믄 정샌이 마터 놨당께."

보리타작은 중무장을 한다. 초여름으로 치닫는 끈끈한 무더위가 찾아오지만 타작이 끝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얼굴만 삐죽 내밀 뿐 온몸을 미끈미끈한 나일론 옷이나 비닐 옷으로 감싼다. 버리면 좋을 모자도 썼다. 좋은 옷을 입었다가 보리가시가 덕지덕지 붙으면 아예 입을 수 없는 사태에 이르니 가능하면 허름한 옷을 입는다. 신발은 신을 필요도 없었다.

어른들이 술을 몇 사발씩 드시는 동안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덕석을 더 널찍하게 펴서 깔고 갈퀴와 낫, 짚 삼태기를 준비했다. 짚 가마니도 차곡차곡 쌓아 뒀다. 당그래와 대빗자루, 합고짝(나무판이나 양철로 만들어 곡식을 퍼 담던 손잡이가 달린 기구)을 손닿는 곳에 두었다.

놉들은 보릿단을 옮긴다. 바삐 움직이는 동안에도 들춰 매는 보릿단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죽 늘어 쌓은 단 높이가 어찌나 높던지 출렁이며 언제 넘어질지 모르겠다. 다독여주고 다시 쌓아 나간다.

막걸리를 대부분 다 마셨지만 한 분은 절대 마시지 않았다. 발동기 주인이나 주인대신 보리를 먹일 사람이다. 기구를 설치하느라 진땀을 뺀 사람들은 막걸리 두세 잔에 행복해했다. 막걸리를 곡주(穀酒)라 한다. 농사지으면서 먹는 술이니 농주(農酒)일 게다. 슬슬 자리를 파하고 발동기 근처로 몰려든다.


"어이, 박샌 자네는 가서 검부적(검불) 좀 빼 부란 말이시."
"알았어라우."

타맥하던 탈곡기는 톱날이 가을철에 쓰던 탈곡기와 달랐다. 어릴 적 뒷다리에 알이 배길 정도로 밟아 벼를 훑어내던 '애옹기'(수동 발판을 자꾸 밟다보면 '애옹' 소리가 나서 붙은 이름일 게다)는 둥근 판에 날을 구부려 박아 엎어진 U자에 가까운 V자였다. 보리타작할 때 쓰던 건 날카로운 못만 촘촘히 박힌 형태였다. 손으로 빙빙 돌려가며 낫을 써서 먼지와 축축한 검불을 걷어낸다.


발동기 설치. 발동기가 있는 위치는 같고 반대편에 타맥기가 있습니다. 이 벨트로 동력을 전달했습니다. 사람은 주로 타맥기 쪽에 있었죠. 이 모습은 가뭄 때 물을 퍼 올리는 장면입니다.
발동기 설치. 발동기가 있는 위치는 같고 반대편에 타맥기가 있습니다. 이 벨트로 동력을 전달했습니다. 사람은 주로 타맥기 쪽에 있었죠. 이 모습은 가뭄 때 물을 퍼 올리는 장면입니다.신안군

1970년 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의 보리밭
1970년 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의 보리밭신안군
발동기에선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먼저 바닥에 놓인 6~7미터나 되는 긴 벨트를 주워 두 사람이서 발동기와 타맥기를 연결한다. 발동기 바퀴는 두개인데 작은 쪽은 한 아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동력을 만드는 큰 바퀴는 어른들 키만 했으니 내 두 배는 되어 우리 나라에 기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선조들이 괴물을 접하는 느낌이었다.

벨트를 거는 사이 물과 기름 보충을 마치고 코를 잡는다. 집채만한 바퀴를 잡고 서서히 돌린다. 처음에는 혼자서 힘을 쓸 수 없어 옆에 있던 몇 사람이 바퀴를 같이 돌려준다. 미동도 않던 바퀴가 코를 잡고 돌려주니 슬겅슬겅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속력을 붙여 더 돌려주니 "푸식 푸식" 소리가 들리더니, 박차를 가하여 잽싸게 온힘을 다 하니 "통! 통! 통!" "퐁!퐁!퐁!" 시동이 걸렸다.

들썩들썩 곧 지축을 흔들며 발동기가 "푹차푹차" 끓이지 않고 튀어 오른다. 수냉식 엔진에 기름기 잔뜩 낀 발동기 물도 위로 팍팍 튀어 올랐다. 실린더 피스톤이 쉴 새 없이 운동을 하자 커넥팅로드가 상하로 춤을 춘다. 크랭크축을 타고 전달된 동력은 회전하여 바퀴를 돌렸다. 노출된 기관을 들여다보는 재미없으면 보리타작이 무슨 낙일까.

연료 공급이 원활치 않은지 "팍팍" "쾅쾅" 튄다. 이 때 앞산이 울렸다. 노킹 현상도 잠시였고 굉음이 잦아들자 고르게 엔진이 돌고 땅과 한 몸이 되어 벨트가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속도가 높아진다.

주변의 모든 소음은 잠자는 듯 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귀를 찢을 것 같은 대단한 소리가 주위를 잠재우니 서로 눈치코치로 알아듣거나 입 모양을 보고서 알아채는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전투에 돌입한다. 순식간에 보릿대가 덕석 바닥에 쌓여 간다.

"야! 뭐혀 얼렁 끄집어 내지 않고!"
"예."

한 깍지(아름)를 보듬어 두 번에 나눠 먹이자 "쏴아" "푹!"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퍽!" 쏟아져 나온다. 풍구에서 확 불어버리듯 밀어내자 함께 나온 보리 알맹이는 가장 가까운 곳에 "투두둑" "후두둑" "찰찰찰"거리며 수북이 쌓인다.

두 사람은 멀리 한 덩이가 되어 날아간 보릿대와 보리 알맹이 근처에 얼씬거리고 있는 보릿대를 긁어 뛰듯 갈퀴 자루로 감싸 한쪽에 쌓아 나간다. 다른 두 사람은 자잘한 보릿대를 빗자루로 쓸어낸다. 또 한 사람은 당그래로 보리 알갱이만을 한쪽으로 모아 치워 나간다.

"쏴아~" "턱!"
"쏴아~" "턱!"

먹이는 걸릴 까닭도 없다. 먹는 족족 곧바로 연신 배설물을 쏟아내는 성난 기계다. 열 받은 발동기에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보릿단 묶음을 낫으로 잘라 풀어 헤쳐 주고 풀어진 단을 먹이는 사람 옆에 밀쳐주는 또 한사람. 그리고 먹여주는 사람. 대체 몇 명이나 보리타작에 동원되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기계 숨소리를 듣는 사람까지….

볏단을 쌓아둔 모습. 보릿대 쌓아둔 곳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두 태워서 버리니까요. 한 때 보릿대에서 설탕이 나온다고 수거해간 적도 있었답니다.
볏단을 쌓아둔 모습. 보릿대 쌓아둔 곳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두 태워서 버리니까요. 한 때 보릿대에서 설탕이 나온다고 수거해간 적도 있었답니다.김규환

석유를 담던 쇠로 만든 드럼통 하나
석유를 담던 쇠로 만든 드럼통 하나김규환
"아따 뭐허요?"
"뭐시라고라우?"
"후딱 안 가져오고 뭣하냥께요?"
"손이 딸린께라우."

제아무리 크게 불러보았자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아신 아버지가 손짓을 보고 달려 오셨다. 옆구리를 푹 찌르며 보릿단이 쌓인 곳을 가리켜서 보니 일이 중간에 그칠 지경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달려가 보릿단을 끌어다 놓는다.

아버지는 헌 와이셔츠를 입고 토시를 끼었는데도 팔뚝이 쓰라리기 시작했다. 목덜미는 땀과 파고든 가시와 먼지가 뒤엉켜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털어 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조심조심 들고 다니던 보릿단을 예닐곱이 대충 업고 지고 보듬어서 날라주니 다시 쌓여갔다.

곧 각자 자리에 돌아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린 내 어깨도 힘이 떨어져 갔다. 게다가 타작을 끝낸 보릿대가 한껏 부풀어 올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여가니 나와 셋째 형은 아예 부서진 보릿대를 두 깎지 정도 끌어안고 묏동을 오르듯 뛰어 올랐다. 손으로 누르고, 어깨로 숨을 죽이고, 발로 밟았다. 엉덩이로 깔고 앉기를 반복하고 또 내려온다.

이제 보릿대 안에 파묻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모자도 한 쪽으로 던져진 지 오래다. 머리엔 먼지와 까끄라기로 꽉 찼다. 그래도 짬을 내서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숨을 고르지 않으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으니 부풀어 오른 보릿대 뒤쪽에 가서 어른들 눈에 보이지 않게 몰래 잠시 쉬는 것이다.

아저씨 한 분은 도랑꽝(드럼통)에서 경유를 뽑는다. 요새처럼 손으로 쭉쭉 짜주기만 하면 옆으로 옮겨지는 편리한 시대가 아니므로 원(原) 통에 투명한 하얀 호스를 밀어 넣고 입으로 쑤욱 빨아 나오는 걸 보고는 작은 통에 입구를 집어넣어 솔솔솔 옮기다가 어느 정도 찼다 싶으면 호스를 빼내면 된다. 그러고 나서 침을 모아 열댓 번이나 석유 뱉어내기를 반복하고 냇가로 가서 입을 헹군다.

짚 삼태기
짚 삼태기김규환

벼나 보리를 말려서 넣고 수매를 위해 묶어둔 짚 가마니. 이걸 아마 한 섬으로 칠겁니다. 쌀로는 80kg 정도 들어갑니다.
벼나 보리를 말려서 넣고 수매를 위해 묶어둔 짚 가마니. 이걸 아마 한 섬으로 칠겁니다. 쌀로는 80kg 정도 들어갑니다.김규환
한쪽으로 긁어낸 보리 알갱이가 쌓여간다. 위로 걷어 올리자 스르르 흘러내리는 모습이 좋다. 구릿빛 보리가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어머니는 올이 촘촘한 방 빗자루로 덜 날아간 줄기 마디를 마저 쓸어낸다.

두 시간이 지나자 절반이 넘어섰다. 마침 그 때 처음에 보릿단을 쌓아둔 곳에서 바알간 생쥐가 보였다. 어미는 햇볕과 사람을 피해 풀숲으로 숨기 바쁘다. 아버지께선 미처 도망가지 못한 '새앙쥐' 네 마리를 손으로 걷어 살며시 어미가 도망간 쪽에 올려놓았다.

보통 웬만한 일이 아니면 발동기를 꺼트리지 않는다. 수동으로 몇 사람이 붙어 다시 시동 걸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 보리타작을 시작하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돌고 있는 사이 끈적끈적한 윤활유를 나무 막대기에 찍어 벨트 안쪽에 발라 준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물이나 한잔씩 마시고 고된 일을 지속한다.

삼사십 분만 더 돌리면 될 즈음이었다. 갑자기 주위가 소란해지더니 사람들이 한 곳으로 몰리고 발동기가 멈췄다. 제일 먼저 아버지가 뛰어 가신다. 어찌나 흡인력이 세던지 교대로 보리를 먹이던 중 아저씨 손이 날카로운 날에 빨려 들어가 엄지손가락과 검지 뼈를 살짝 건드려 잘려나갈 일촉즉발의 위험한 순간이었던 모양이다.

"어이 괜찮아? 아따 이 사람 조심허지 않고…. 큰 일 날 뻔 했구먼."
"괜찮아라우. 째까 긁어분 것 같소."

아버지는 코를 풀게 하고 담뱃가루를 섞어 러닝셔츠를 찢어 동여매주었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없는 반찬에 밥을 한술씩 뜨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제 탈곡기가 뱉어낸 보릿대는 쌓아둔 곳은 한 무더기로도 부족하여 옆에 붙이니 작은 동산이 하나 더 생겼다.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자 주변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일로 내 임무가 바뀌었다. 삼태기에 이삭을 주워 나르고 몇 다발을 마저 옮겨주었다.

"푸식 푸식 푸우~"
긴 한숨을 내뱉고 발동기는 멈췄다. 벨트도 돌지 않았다. 순간 비릿한 그리스 냄새가 확 풍겼다. 엔진이 약간 미동이 있는 동안 아저씨는 벨트를 벗기고 단단히 고정했던 쇠말뚝을 쳐서 빼냈다.

"휴-"
이제 한 해 농사 절반은 지은 건가. 함께 했던 사람들은 모두 거지꼴이 되었다.

녹 슨 6, 70년대 발동기-선배가 준 사진
녹 슨 6, 70년대 발동기-선배가 준 사진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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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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