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보리타작하는 장면을 구하지 못해 가을추수 장면을 대신 싣습니다. 학생들이 동원된 듯 합니다.장성군
수확은 즐겁다. 그렇다면 타작은 반드시 즐거울까? 아니다. 보리타작은 그렇게까지 즐겁지 않았다. 말이 타작이지 고역이다. 가시와의 전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온 세상 먼지와 온갖 보리 까시락(까끄라기)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뒤집어쓰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노동 강도는 세상에 둘째가라하면 서럽다. 아이들은 두 세시간 하고 마니 마지못해 하는 것이며 어른들은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니 도리가 없다.
터를 잡고 발동기와 탈곡기 설치를 마친 어른들은 틉진(걸쭉한) 막걸리를 노란 주전자에 콸콸 쏟아 대접에 한 그릇 씩 따라 마셨다. 안주랬자 멸치 볶음과 배추 겉절이다. 아저씨들은 버릇처럼 막걸리를 손으로 휘휘 젓고 젓가락도 없이 손으로 몇 개 주워 먹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꺾어 입에 가져가 "꺼억-" 소리를 내며 드신다.
"자, 한판 해보더라고!"
"점때 지나믄 정샌이 마터 놨당께."
보리타작은 중무장을 한다. 초여름으로 치닫는 끈끈한 무더위가 찾아오지만 타작이 끝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얼굴만 삐죽 내밀 뿐 온몸을 미끈미끈한 나일론 옷이나 비닐 옷으로 감싼다. 버리면 좋을 모자도 썼다. 좋은 옷을 입었다가 보리가시가 덕지덕지 붙으면 아예 입을 수 없는 사태에 이르니 가능하면 허름한 옷을 입는다. 신발은 신을 필요도 없었다.
어른들이 술을 몇 사발씩 드시는 동안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덕석을 더 널찍하게 펴서 깔고 갈퀴와 낫, 짚 삼태기를 준비했다. 짚 가마니도 차곡차곡 쌓아 뒀다. 당그래와 대빗자루, 합고짝(나무판이나 양철로 만들어 곡식을 퍼 담던 손잡이가 달린 기구)을 손닿는 곳에 두었다.
놉들은 보릿단을 옮긴다. 바삐 움직이는 동안에도 들춰 매는 보릿단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죽 늘어 쌓은 단 높이가 어찌나 높던지 출렁이며 언제 넘어질지 모르겠다. 다독여주고 다시 쌓아 나간다.
막걸리를 대부분 다 마셨지만 한 분은 절대 마시지 않았다. 발동기 주인이나 주인대신 보리를 먹일 사람이다. 기구를 설치하느라 진땀을 뺀 사람들은 막걸리 두세 잔에 행복해했다. 막걸리를 곡주(穀酒)라 한다. 농사지으면서 먹는 술이니 농주(農酒)일 게다. 슬슬 자리를 파하고 발동기 근처로 몰려든다.
"어이, 박샌 자네는 가서 검부적(검불) 좀 빼 부란 말이시."
"알았어라우."
타맥하던 탈곡기는 톱날이 가을철에 쓰던 탈곡기와 달랐다. 어릴 적 뒷다리에 알이 배길 정도로 밟아 벼를 훑어내던 '애옹기'(수동 발판을 자꾸 밟다보면 '애옹' 소리가 나서 붙은 이름일 게다)는 둥근 판에 날을 구부려 박아 엎어진 U자에 가까운 V자였다. 보리타작할 때 쓰던 건 날카로운 못만 촘촘히 박힌 형태였다. 손으로 빙빙 돌려가며 낫을 써서 먼지와 축축한 검불을 걷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