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추억의 소리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 분투기(5)

등록 2004.06.14 10:58수정 2004.06.14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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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먼지 쌓인 턴테이블의 뚜껑을 열고 LP판을 돌려 음악을 듣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작동하다보니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잠시, 판은 별 문제 없이 작동하였다. 순간 나는 처음 본 낯선 기계를 어찌어찌 해서 작동시켰을 때 같은 야릇한 기쁨을 느꼈다.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음악에 섞여 나오는 그 투박한 잡음 소리가 들려온다.

이 특유의 잡음 소리는 비 오는 창가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듣는 것이 제 맛인 것 같다. 창가에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와 LP판이 긁히는 것 같은 잡음 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끊길 듯 끊길 듯 마음을 파고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오늘은 비도 안 오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그 잡음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는커녕 오히려 친근하고 살갑게 들린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그건 아마 실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디지털 음원에 지겨움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디지털 컨텐츠 사업 중 벨소리와 각 통신업체에 따라 컬러링, 필링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통화 연결음 업체들의 사업이 잘 나간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대방의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통화 연결음이 전화 건 사람의 기분이나 나이에 따라 소음으로도 인식될 수 있다.

소음으로 들리는 통화 연결음


한 선배가 전화를 걸다가 짜증난 얼굴을 하고 있기에 슬쩍 그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 선배가 짜증난 이유는 의외였다. 그 선배는 상대방의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통화 연결음이 짜증난다는 것이다.

6명에게 휴대폰을 걸었는데 모두 연결되지 않을 뿐만아니라 그들의 통화연결음도 너나할 것 없이 요즘 유행하고 있는 '모(某) 가요'였다는 것이다.

그 노래 자체가 좋은 것은 알지만 특정한 대목만 계속 연결하여 들려주다보니 전화를 걸려는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휴대폰을 한 자신은 좀 짜증난다는 것이다.

그 선배는 "오히려 예전의 벨소리가 덜 질린다"면서 "왜 사람들은 통화 연결음이란 것을 만들어서 새로운 스트레스를 유발시키는 거냐"며 불만스러워 했다.

그 선배의 불만을 듣다보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는 쪽도 선배처럼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지만 통화 연결음을 꾸미는 쪽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적절하게 통화 연결음과 벨소리를 바꿔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에 못지않게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 때문인지 모르지만 요즘 신세대들은 유행하는 소리로 통화연결음을 수시로 바꾸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전하는 이들도 있다.

지지직거리는 LP판 소리를 들으면서 디지털 음원에 대한 갈등도 결국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 스트레스 또한 인간이 자초

어떻게 하면 잡음이 없는 원음의 소리로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좋은 음악을 듣고자하는 이들의 꿈이었다. 음반의 역사로 볼 때 사람들은 그 해결책을 디지털에서 구했다.

음악 CD가 처음 발매되었을 때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LP의 잡음 없이 깨끗하고 명징한 CD의 음질에 대해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덧 CD는 LP라는 낡은 형식을 대체하고 시장의 대부분을 석권하였다.

결국 잡음없는 원음의 소리를 구현하겠다는 의도에서 디지털방식을 차용한 CD가 거꾸로 그 CD를 토대로 쉽게 변환가능하게 된 불법 디지털방식의 음원 때문에 발목을 잡히게 된 것이다.

결국 몰라도 스트레스, 알아도 스트레스 이래저래 스트레스 천지이다. 문득 사람들이 시간을 아끼려하면 할수록 더욱 시간의 노예가 된다는 미카엘 엔데의 소설 <모모>가 생각난다.

바로 그 소설 속 시간 절약에 찌들어 스트레스와 과로로 삭막해지는 이웃의 모습이 바로 디지털 마인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여기저기 휘둘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여유 필요

어느덧 LP판은 정지해 있었고, 나는 다시 바늘을 되돌려 앞으로 놓았다. 잡음 섞힌 음악은 다시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점점 오차를 용납하지 않고 완벽함을 구현하고자 하는 삭막한 디지털 세상에서 그래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불완전함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가?

마치 이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섞인 음악처럼, 완벽하려고는 하지만 그리 완벽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삶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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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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