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에 핀 할미꽃처럼 굽은 어머니의 허리

아침 일찍 머위 줄기를 베러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등록 2004.06.14 23:11수정 2004.06.1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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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보니 어머니가 낫을 들고 집을 나서고 계셨습니다. 어제 하루 종일 오랜 가뭄과 불볕 더위로 굳어질 대로 굳어진 밭에서 마늘을 캔 후 눈에 띄게 힘들어하시더니 이른 새벽부터 또 어디를 가신다는 것인지…. 아침 햇살이 막 떠오르기 직전입니다.


이기원
"더 쉬시지 어딜 가세요."
"우리 논두렁에 머우(머위) 좀 끊어 올라구."
"우리 논두렁에 머우가 있었어요?"
"예전에 아부지가 한 뿌리 캐다 심었는데 이젠 논두렁에 그득하다."
"아침 먹고 제가 가서 베어 올테니 그냥 쉬세요."
"아니다. 모처럼 집에 와서 일요일은 푹 쉬다 가야지."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시내 사는 자식들이 한 번씩 시골집에 들르면 정작 쉬어야 할 분은 어머니인데, 오히려 자식들을 위해 쉴 틈이 없습니다. 아침 먹고 떠난다는 아들 내외에게 찬거리를 챙겨주려고 논두렁에 그득히 자란 머위 줄기를 베러 나가는 어머니.

시내 살면 모든 게 다 돈이라며 밭에다 직접 키운 열무, 배추, 마늘은 물론이고 논두렁에 자라는 머위 줄기, 발자국으로 다져진 밭두렁을 비집고 올라온 질경이까지 골고루 챙겨 보내셔야 직성이 풀리는 어머니입니다.

논두렁엔 어머니 말씀대로 머위 줄기가 그득했습니다. 길게 고개를 내밀어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머위 잎사귀가 탐스럽게 논두렁을 덮고 있습니다. 논두렁으로 내려가서 머위 줄기를 잘라 내는 어머니의 굽은 허리가 오랜 세월 힘든 삶을 살아오신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려옵니다.

이기원
베어낸 머위 줄기를 포대에 담아 집으로 가져오신 어머니는 마당 끝 두엄 더미 앞에서 머위 잎을 뜯어냈습니다. 어머니 옆에 서서 머위 줄기를 모으다보니 껍질 까고 양념해서 삶아낸 머위 줄기의 싱그런 맛이 입안에 가득 묻어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집 식탁에 올려진 머위는 언제나 어머니께서 잘라 보내신 것이었지요.


머위 잎 뜯어내는 일이 끝나갈 무렵 어머니는 카메라를 의식하시곤 한마디 하셨습니다.

"꼬부랑 할망구를 뭐할라고 찍어."

신산스런 세상을 온몸으로 지탱하시며 자식들을 키워내신 어머니는 회갑이 되기도 전에 허리가 굽으셨습니다. 자식들이 학교 졸업하고 결혼해서 가장이란 이름으로 한 가정을 꾸려나가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오신 어머니의 삶이 고스란히 굽어진 허리에 담겨 있습니다.


이기원
머위 줄기 다듬어 끈으로 묶어 집으로 들고 들어가시던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십니다. 어머니의 품에 기대어 서서 한바탕 어리광이라도 피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머니 허리는 들녘에 피어난 할미꽃처럼 애잔한 모습으로 굽어 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굽어진 허리 위로 쏟아진 하얀 햇살이 눈부신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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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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