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추면 나를 버릴 수 있어요"

춤 속에서 예와 도를 찾는 춤꾼 최정임 교수

등록 2004.06.16 22:27수정 2004.06.17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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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신라춤의 재현을 위해 신라 토우와 불상의 모습을 연구하고 있는 최정임씨

신라춤의 재현을 위해 신라 토우와 불상의 모습을 연구하고 있는 최정임씨 ⓒ 황정현

산스크리트어에서 춤은 '생의 욕망'을 뜻한다. 모든 행위와 움직임, 사는 것, 기뻐하며 춤추는 욕망. 춤은 인간의 희노애락에 대한 욕망을 분출시키는 행위이다. 여기 춤을 '꿈꾸는 이상'이라고 정의하고 30년을 그 이상을 꿈꾸며 살아온 춤꾼이 있다.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치는 최정임 교수(51).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는 최 교수의 춤에 대한 철학은 다소 의외였다. 춤은 그저 몸으로 표현하는 인간의 예술행위라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


"예(禮)의 경지가 무(舞)의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춤은 예술을 뛰어넘어 도(道)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요"

그녀는 춤을 추면 자신을 버릴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 그저 춤추는 사람으로서만 존재할 뿐인 춤의 세계. 그녀는 그 안에서 희열을 맛보는 것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여중고를 나온 그녀가 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순전히 완고한 아버지에 대한 도전 때문이었다. 사회부 기자나 방송국 앵커가 꿈이었던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당시 여자들에게 최고 인기학과였던 사범대나 가정대에 들어가기를 종용받았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고민하던 그녀는 방황하다 포항에 있는 무용학원에 다니며 춤에 입문했다. 고교시절 신라문화제 등 문화행사가 있을 때마다 무용수로 뽑혔던 기억 하나만으로 도전한 것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중앙대학교 무용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춤의 세계에 제대로 빠져들었다. 75년 서울시립무용단 창단멤버로서 프로의 길에 들어선 그녀는 77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했다.


a 그녀는 국립무용단원으로 20년간 활약했다.

그녀는 국립무용단원으로 20년간 활약했다. ⓒ 최정임씨 제공

그 후 20년간 국립무용단원으로 활약하면서 해외공연까지 합해 700여 편이 넘는 공연에 출연했다. 처음 국립무용단에 들어가면서 반드시 주인공을 맡아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하루 10시간이 넘도록 연습에 매달렸다.

그런지 7년 만에 이차돈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에서 평양공주역을 맡았다. 그러나 주인공이 되는 것보다 주인공의 자리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고 힘들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공휴일도 없이 그녀의 강행군은 다시 시작됐다. 연습과 공연으로 인해 데이트 한 번 제대로 못해본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곳은 국립무용단의 연습실과 탈의실에서 바라본 남산이었다.

96년 아틀란타올림픽을 한 달여 앞두고 그녀는 사표를 냈다. 국립무용단측에서는 돌연 그만두겠다는 그녀를 만류했지만 이미 체력적인 한계와 영광스러울 때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을 굳혔기에 과감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경주로 귀향한 그녀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지휘자였던 박범훈 선생의 소개로 현재의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후학 지도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전야제를 시작으로 3회에 걸쳐 안무가로, 또 주인공으로 참여했던 그녀는 경주의 춤꾼으로 신라춤을 재현할 욕심을 갖고 있다. 문헌상 기록이 거의 없어 복원은 불가능하지만 토우와 불상 등에서 착안해 신라춤을 만들어보겠다는 계획이다.

a 2003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막 공연인 '천마의 꿈'을 안무하고 직접 무대에도 섰다.

2003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막 공연인 '천마의 꿈'을 안무하고 직접 무대에도 섰다. ⓒ 황정현

특히 원융회통 사상이 잘 나타난 원효대사의 '무애무'나 여성의 몸으로 단합과 융화로 평화를 이끌어낸 선덕여왕 이야기를, 무용을 중심으로 한 총체극으로 만들겠다는 다부진 포부를 밝혔다.

여기에는 반드시 시립무용단과 같은 전문무용단이 필요한데 아직 경주에는 없다. 그래서 최 교수는 신라춤 재현의 첫걸음으로 시립무용단 결성을 추진할 계획이다.

송범 선생에게서는 춤에 대한 열정을, 최현선생에게서는 타고난 예인의 기질을, 강선영 선생에게서는 철저한 준비성, 폭넓은 춤의 경영성과 혜안을, 거기에 그녀가 가지는 춤에 대한 욕망을 가미해서.

요즘 춤을 배우는 학생들은 '무대에 서고 싶은 욕망은 강한데 노력을 안한다'고 지적하는 최정임 교수는 진정한 춤꾼은 '춤을 생각하고 추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춤을 추는 사람이다'라며 열정을 가슴에 품고 추는 춤꾼이 되라고 일침을 가한다.

한국의 춤의 매력은 그녀의 표현대로 여백의 미(美)다. 동작이 잠시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그 느림의 미학에 내재된 아름다움과 힘, 그녀는 그걸 즐길 줄 아는 춤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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