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84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6.18 11:46수정 2004.06.1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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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은 문득 손길을 멈추었다.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에게 뱀 이야기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장군이 뱀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사실도 말했다. 하다면….

'외삼촌은 정말 장로회에서 진실을 밝혔는가? 그런데도 장군에게 그런 형벌이 내려졌는가? 그는 장로회를 움직일 수 있는 신분이었다. 설령 누군가가 정말로 고발을 했다고 해도 장군은 자신들의 손님이었다. 일차적인 권한은 자신들에게 있음에도 외삼촌은 쉽게도 그의 형벌을 묵인하고 말았다.'


닌은 다시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보았다. 자신들이 니푸르의 주민이 된 건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다. 변란 뒤 옮겨온 후 그냥 정착해버린 것이었다. 남편도 없는 딜문으로 돌아가야 뭘 하느냐고, 어머니를 설득하고 주저앉힌 사람은 외삼촌과 할머니였다. 한데도 니푸르의 법통을 따라야 하는가?

'그래, 그는 촌장이다. 스스로 먼저 법통을 지켜야 할 신분이라 자기 친척이라고 해서 예외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모부는? 장군이 딜문을 구해주었는데도 자기는 장군을 구할 생각은 않고 외삼촌과 오래오래 의논만 했다. 장군은 이미 사막으로 가고 있는데,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는데도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긴지 좀처럼 외삼촌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 어서 외삼촌 방에 가 보세요. 어서 빨리 방도를 찾으라고 재촉이라도 하고 오세요.'
닌이는 할머니를 재촉했다. 할머니도 답답했던지 그 방을 다녀와서는 닌에게 알려주었다.
'곧 두수를 출발시킨다는구나. 너도 따라가거라. 말도 두 필이 있다니 마침 잘된 일이지. 자, 이리 오너라.'

그리고 할머니는 약초와 물 탕기를 챙겨준 후 그녀의 머리까지 잘라주었다. 너무 길면 여자로 드러나기가 쉽다고, 어깨만큼 자른 후 뒤로 묶어주면서 머리수건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늘 조심하라고 일렀다.

그녀가 두수 오빠와 함께 야자나무 나루터로 나왔을 때 이모부가 따라 나와 닌에게 말했다.
'두수는 감시자의 신분으로 떠난다. 하지만 그는 사막 끝까지만 동행할 것이다. 그 사막 끝에는 선착장이 있고 거기에 배들이 있다. 두수는 너와 장군을 검은 여신상이 걸려있는 배까지 안내한 후 되돌아올 것이다. 그리면 너는 장군과 함께 그 배를 타야 한다.'


'그 배를 타고 우리는 어디로 가지요?'
'그것까지는 알 것 없다. 그 배에서 내려 항구 밖으로 나가면 누군가가 마중 나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그 사람이 하자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마침내 나루터 배가 왔고 두수와 닌은 말과 함께 그 배에 올라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온 것이었다.
닌은 손을 멈추고 호송원들 쪽을 바라보았다. 불이 피어올랐다. 저녁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문득 아까 그들끼리 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늘은 때맞추어 물웅덩이를 찾았지만 내일은 어떨지 참…. 더욱이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뉘 아니래. 정말이지 이 사막은, 말이 호송이지 그저 지옥행과 같다니까.'
그리고 그들은 오래 가족들과 떨어지는 이런 일은 돈을 주더라도 사양하고 싶다고 푸념했다.

닌은 생각했다. 혹시 돈을 준다면 이쯤에서 저들을 돌려보낼 수 있을까? 그러면 자신은 에인을 태워 딜문으로 달아날 수 있을 텐데?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두수오빠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기 아버지 입장이 난처해질 테니까.
닌은 그렇게 자기를 다스린 후 다시 보리이삭을 따기 시작했다.

사막에 밤이 내려앉았다. 희미한 은하수가 까만 허공에 홀로 걸렸고 그 사이로 모래바람이 두툼한 천처럼 흘러 다녔다. 호송원들도 잠자리로 돌아가자 닌은 덮을 것을 들고 메스키트 나무쪽으로 올라갔다.

에인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발을 잡고 발목 노끈을 찾아보았다. 노끈은 금방 손에 잡혔다. 그녀는 칼을 꺼내 양 다리를 걸어둔 그 이음새부터 잘라냈다. 그리고 발목에 묶인 끈을 찬찬히 풀어냈다. 그때까지도 에인은 깨어나지 않았고 계속해서 고달픈 숨소리만 가쁘게 토해낼 뿐이었다.

그녀는 홑이불을 펼쳐 그에게 덮어주고 자신도 그 옆에 나란히 누웠다. 에인의 숨소리가 바위를 짊어진 사람보다 더 고통스럽게 들려왔다. 죄의식이 그녀 가슴에서 또다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당신은 이렇게 되었어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구출해줄 수가 없어요. 용서하세요, 그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 우매한 닌을 부디….'
그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나 저 하늘은 알고 있지요. 당신은 이미 내 신랑, 신랑이어요. 당신은… 처음으로 나의 알몸을 본 사람, 그 누구도 내 곁에서 떼놓을 수가 없지요. 당신이 설령 저 세상에 간다고 해도, 지하 세계의 그 어둑한 곳에 간다고 해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간다고 해도, 닌이는 당신을 따라갈 거예요. 죽을 때까지 당신 곁에서 당신과 함께 할 거예요. 당신은 영원한 나의 신랑이니까요….'

그녀는 가만히 에인의 손을 끌어 잡고 그 손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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