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나라는 그동안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한가지 의무에 대한 심각한 논쟁에 빠져 있다. 바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찬반논쟁이다. ‘군대 가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는 쪽과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가 의무만큼이나 중요하다’라는 쪽이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결과는 뻔해 보인다. 그 이유는 국방은 ‘신성한 국민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방의 의무는 왜 신성한가?
‘징병제, 이루지 못한 근대의 꿈’
6월호 <인물과 사상>지에 이에 대한 다소 색다른 해석을 한 글이 있어 눈길을 끈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는 박노자 교수의 글이 그것이다. 박 교수는 징병제를 “개화기 때 실현되지 못한 ‘근대의 꿈’”이라 말하며 징병제에 대한 역사적인 근원을 캐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논쟁은 잠시 뒤로 미루고 박 교수의 글을 찬찬히 읽어 보자.
박 교수에 의하면 징병제에 대한 위정자들의 ‘집착’은 구한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근대적인 군대를 양성하지 못했던 구한 말의 이 땅은 징병제가 확립된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는다. 서구와 일본을 아는 당시의 개화 지식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강한 군대만이 살길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다.
그 중 한명인 서재필은 서구의 군인을 ‘문명인’의 모델로 보고 비문명인인 이 나라의 백성들을 문명화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다 병사”라는 당시 서구 열강의 현실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가 만든 독립신문의 이데올로기적 기초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충군애국'이었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과는 달리 결국 강한 군대는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과 서구 열강들이 이 땅에 강한 군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혹독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미국의 도움으로 해방된 후 들어선 이승만 정권에 와서야 '이룰 수 없었던 근대의 꿈'인 징병제에 대한 실천이 시작됐고 6·25 전쟁을 거친 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와서야 확립됐다.
과거 구한 말 개화 지식인들이 그토록 본받고자 했던 것이 일본이었고 박정희는 바로 그 일본이 세운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다. 개화 지식인들의 꿈을 박정희가 현실로 만들었으니 구한말의 이상과 염원이 담긴 징병제의 혜택을 지금에 와서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제도 언론을 통해 전파된 ‘신성한 국방의 의무’
박노자 교수는 과거 비문명인 조선인을 문명인으로 개화시키기 위해 군대가 필요했던 것처럼 분단된 남한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충실한 민주시민으로 훈육하기 위해서도 '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사람은, 다시 말해 국가가 원하는 민주시민으로 훈육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은 취업은 물론 결혼까지도 수월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 사회가 아니었던가. 과거 군사 정권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았던 교련 과목을 생각해 보자. 교련 선생님의 호통보다 더 무서운 군사 정권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에 대한 의심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은 너무나도 컸다. 박노자 교수는 이에 대해 노암 촘스키 교수의 말을 빌어 “민중으로 하여금 반민중적 체제를 받아들이게 하는 주범은 제도적 언론”이라고 말한다.
군대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의 어머니들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아들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리고 우리 아들이 제대하면 더 믿음직한 남자가 되어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잊을 만하면 소개되는 해병대와 특전사의 훈련 모습은 군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의 가슴에 강한 인상을 남기고, ‘우리도 그들처럼’ 멋있게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마치자고 다짐하게 만든다. 이처럼 언론의 군대 예찬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소중한 지면을 충실히 채워 왔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충국애민’이 100여년 전 독립신문의 이데올로기적 기초였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언론들의 군대 예찬은 어쩌면 그렇게 변한 것이 없을까. 박 교수의 말처럼 100여년 전 초기 근대적 이상으로서의 징병제를 이제는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일부 보수 언론들이 얼마 전 이 나라를 들끓게 했던 친일 청산에 대해 맹목적인 과거 지향이라 매도했던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들의 군대 예찬은 맹목적인 과거 지향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누가’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2004년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논쟁으로 돌아가자. 여전히 양심적 병역거부는 뜨거운 논쟁거리이며, 이 논쟁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은 일단 뒤로 미루어진 상태다. 얼마 전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판결로 이목을 끈 판사도 있긴 했지만, 여전히 대세는 명확한 판정이 내려지지 않은 채 소수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만 느껴지는 형국이다.
간혹 현재의 징병제가 얼마나 노동집약적이고 비효율적인지를 주장하는 소수의 전문가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거부한다는 더 큰 목소리에 묻혀버리기 일쑤였다. 길거리 인터뷰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시민들은 부정적이다. 이들 중에는 "남자는 군대를 다녀 와야 사람이 된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 말은 이 사회에서 엄청난 호응과 힘을 얻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약간의 농담을 해도 좋다면 이 땅에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과 다녀오지 않은 사람, 이 두 종류의 사람만 살고 있다. 좀 더 국민 정서에 맞게 말한다면 군대에 끌려간 사람과 끌려가지 않은 사람이 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신의 아들과 신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있다.
문제는 지금의 논쟁이 이들 두 종류의 사람들간의 대립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다루는 대부분의 언론을 보면 이 논쟁에는 어떠한 생산적이고도 발전적인 대안은 발붙일 틈이 없어 보인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는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은 물론 심각하게 고려돼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이지, 남자라면 누구나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무조건 수행해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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