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 목숨 바쳐 싸웠건만..."

6·25참전용사 박용암 무공수훈자

등록 2004.06.26 18:30수정 2004.06.27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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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박용암 무공수훈자

박용암 무공수훈자 ⓒ 이성원

"6·25전쟁 때 목숨 바쳐 싸웠고 7년간 군복무를 하면서 청춘을 다 보낸 후 중위로 전역했으나 아직 퇴직금도 못 받았습니다."

6·25 참전용사 박용암(77·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5리) 무공수훈자의 하소연이다. 박씨는 6·25전쟁이 터진지 13일만에 입대, 포병 제1기갑사단 82포병대대에 배치됐다. 군번은 140374.

82포병대대는 1950년 8월 초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달성군 화원읍)에서 도하하려는 인민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박씨는 "이 방어선이 무너지면 모두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155mm 곡사포로 대적했던 그 때가 꿈만 같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로 박 수훈자는 전우와 함께 북진을 계속, 평양 위쪽 땅까지 밟았으며 51년 1·4후퇴 등을 하는 과정에서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얼마나 많은 포탄를 쏘았을까. 열을 받을대로 받아있는 아군포에 장착된 포탄이 터져 박씨 바로 옆에 있는 분대원이 몰살됐다. 그것도 모르고 전우들은 사력을 다해 인근 산으로 뛰었다. 피신하는 길에 철조망과 방공호 등 장애물이 있었으나 '수퍼맨'처럼 날아갔으니 군복 한 군데 찢어지지 않았고 전혀 숨이 차지 않았다고 한다. 박 수훈자는 사선(死線)에서 나오는 초능력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냐며 당시를 회상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은 얼마나 궁금할까. 박씨는 1950년 22세에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한지 5∼6개월만에 6·25전쟁이 발발, 입대하면서 가족과 헤어졌다. 전쟁터에서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면 도착하는데 3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박씨는 장장 7년간(6·25전쟁기간 3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57년 7월 중위로 제대했으나 47년이 지난 현재까지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 다만 무공수훈자로서 4년 전부터 명예수당 5만∼9만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3년간 사선을 넘나들면서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고 청춘을 군복무에 바쳤는데 이같은 대우가 웬 말인가.


박 수훈자는 "16대 국회서 이와 관련한 법안이 통과된 만큼 퇴직금이 곧 지급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당국은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6·25 참전용사들의 공로를 정확히 따져 연금지급 등 혜택을 주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칠곡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6·25 참전용사는 700여명이며 이 가운데 무공수훈자는 6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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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갖자"는 체 게바라의 금언처럼 삶의 현장 속 다양한 팩트가 인간의 이상과 공동선(共同善)으로 승화되는 나의 뉴스(OH MY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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