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냐 의학이냐...고심많이 했죠"

[IT 인물열전-①]의사에서 보안 전문가로 - 안철수 대표

등록 2004.06.30 12:13수정 2004.06.3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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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안철수 대표

안철수 대표 ⓒ 이정일

외유내강.

안철수 대표가 바로 그렇다. 하얀 피부에 수더분한 인상이지만 속은 꽉찬 차돌마냥 단단하고 굳세다. 보통 때는 한없이 신중하지만 기회다 싶으면 폭풍처럼 밀어붙인다.

미래가 보장된 의사 가운을 벗어던질 때도, 30대 초반 홀로 유학길에 오를 때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과학문화재단이 뽑은 '가장 닮고 싶은 과학기술인', 대학생들이 꼽은 '가장 이미지가 좋은 CEO' 외에도 한국윤리경영대상, 아시아 젊은 기업인상, 아시아의 스타 25인, 차세대 아시아의 리더…등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경력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수식어들이 부담스럽다.

"10분 강연할 재주밖에 없는 사람이 1시간 동안 지루하게 얘기하는 것은 청중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잘 하는 것이라곤 백신 만드는 일 뿐인데 여기저기서 지나치게 치켜세우니 곤혹스럽네요."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니다. 주변의 평가를 즐긴다고 누가 탓할까마는 그는 우쭐할 줄 모른다. 겸손이 몸에 밴 데다 허세와 위선을 싫어한다. 타고난 성품이다.

바이러스와 우연히 만나다


그에게는 '의사 출신 CEO'라는 타이틀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서울대 의대 졸업에 20대 의학 박사 그리고 20대 의대 교수까지 남부럽지 않은 인생이었다. 그런 그가 험난한 벤처의 길을 걸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82년 서울대 의과본과 1학년 때다. 하숙집 친구가 쓰던 '애플 II+'가 부러워 이듬해 컴퓨터를 샀다. 컴퓨터 서적을 탐독하면서 기계어를 공부했다. 취미 이상의 열정이었다. 그러다 88년 브레인 바이러스에 PC가 감염되고 말았다.


"기계어를 공부하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브레인 바이러스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결국 치료 프로그램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백신이지요. 바이러스와 맺은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그 뒤에도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오면 백신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PC통신이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다. 백신을 복사한 플로피 디스크를 잡지사에 넘겨주면 PC 이용자들이 디스켓에 복사해 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에게 주어진 일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그 때는 PC가 대중적이지 않았고 소프트웨어 값도 만만치 않았어요. 워드프로세서 사기도 벅찬데 백신까지 돈을 줘야 한다면 소비자들의 부담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PC 보급도 늦어졌겠지요. 그리고 나 같은 아마추어 프로그래머가 바이러스를 막아주면 전문가들은 더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a 서울의대 기숙사 시절 친구들과 휴식시간을 보내는 안철수 대표

서울의대 기숙사 시절 친구들과 휴식시간을 보내는 안철수 대표 ⓒ 안철수연구소제공

힘들었지만 사명감과 보람은 컸다. 의학 연구와 백신 개발,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았지만 둘다 짊어지고 강행군을 시작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졸린 눈을 비벼가며 백신을 만들고 출근해서는 의학 연구에 매달렸다. 그렇게 7년을 지냈다.

"결국 이중생활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군의관 복무를 마친 뒤 컴퓨터냐 의학이냐를 선택해야 했어요. 몇 달 간 심사숙고하다보니 자연스레 정리가 되더군요. 의대 교수보다는 컴퓨터를 만지면서 느꼈던 자부심, 보람, 사명감, 성취감이 더 컸어요. 결국 14년 간 공부해 온 의학을 포기했지요."

죽을 만큼 힘들었던 유학 생활

95년 3월 마침내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직원 3명에 보잘 것 없는 규모였다. '한글과컴퓨터'가 5억원을 지원해 준 것이 큰 힘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는 경영에 까막눈이었다. 10년 이상 오로지 의학 공부와 백신 개발에만 매달려온 탓이다.

결국 95년 9월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의학과 컴퓨터를 접목한 메디컬 인포메틱스(의료 정보학)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회사 경영에 필요한 지식이 급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EMTM(일종의 테크노 MBA) 코스를 밟았다.

"랭귀지 스쿨도 거치지 않고 들어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한글로 배워도 힘든 경영학을 영어로 공부하니…. 게다가 수업이 토론 위주잖아요. 안(Ahn)이라는 성 때문에 출석부에 첫째로 올라와서 언제나 발표를 도맡아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그나마 공부만 할 수 있었다면 편했을 것이다. 대표이사로 한국에 있는 회사까지 챙겨야 했다. 간단한 업무는 전화로 끝냈지만 서류 검토와 결재가 필요하면 처음에는 팩스를 이용하다가 PC를 산 뒤에는 e-메일로 처리했다. 그것도 모자라 3주에 한번꼴로 한국을 드나들었다.

회사 운영과 공부로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 몸이 열이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는 지난 2001년 펴낸 <영혼이 있는 승부>에서 유학 기간의 고통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웬만큼 공부를 했더라도 학위는 충분히 받고 귀국할 수 있었다. 문제는 선택한 것에 대해 병적일 정도로 대충대충 하지 못하는 나의 성격이었다. 회사 일과 공부, 두 가지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생활 계획도 빡빡하게 짰다. 일과 공부의 양이 늘어나자 잠자는 시간도 대폭 줄여야 했다. 그래서 이틀에 하루는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1995년 9월부터 1997년 8월까지 2년은 개인적인 휴식에는 시간을 전혀 투자하지 않았다. 늘 몸과 마음이 바빴고 시간은 부족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1천만 달러에 파시요."

힘든 유학 생활에도 회사는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었다. 96년 1월 첫 상용 제품인 'V3 프로 95'를 내놓는 등 제품 개발과 연구 부문에서 제법 성과를 거뒀다. 문제는 마케팅이었다. 한글과컴퓨터와 맺은 관계를 청산하고 삼성SDS와 손을 잡았다. 안정된 영업망을 확보하면서 회사는 발전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이즈음 안철수연구소가 외국기업에 넘어갈 뻔한 일이 있었다. 스캔 백신으로 알려진 맥아피는 90년 대 초 시작된 미국 시장의 성장세가 97년을 기점으로 주춤하자 아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일본 유일의 백신 회사 제이드를 사들이면서 본격적인 아시아 공략에 나섰다.

다음 목표는 안철수연구소였다. 97년 6월 안철수는 실리콘 밸리에 있는 맥아피 본사로 초청받아 빌 라슨 회장에게서 깜짝 놀랄 제안을 받는다.

"V3을 우리에게 넘기시오. 당신 회사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1천만 달러를 지불하겠소."

a 1995년 3월 창립식에서

1995년 3월 창립식에서 ⓒ 안철수연구소제공

직원들 월급 주기도 빠듯한 그에게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궁핍한 살림 때문에 유학비용은커녕 월급까지 포기한 처지였다.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큰 돈이라도 국내소프트웨어 산업을 지키고 직원들을 책임져야 하기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어요. 무엇보다 회사의 미래가 그가 제안한 액수보다 훨씬 값질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지요."

97년 10월 그는 2년여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지만 뜻밖의 암초에 부딪친다. 귀국 이틀 뒤 급성 간염으로 쓰러져 몇달 간 병상을 지켜야 했고 IMF 환란으로 시장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오랜 배움 끝에 이제 겨우 뭔가 해보려는데 발목이 잡히니 참담한 심정이었다.

유학시절의 고통은 희망으로 견뎠지만 귀국 뒤 잇따른 악재는 버티기 힘들었다.

"회사를 꾸려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입니다. 나라 전체가 위기였으니 조그만 벤처는 말할 것도 없지요. 의기소침한 저에게 직원들은 큰 힘이었어요. 끈끈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격려하면서 희망을 키워 나갔습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그에게 IMF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였다. 대출 이자가 오르면서 다들 빚을 갚느라 아우성이었지만 안철수연구소는 끄덕 없었다. 빚을 지지 않고 살림을 꾸려가는 경영철학이 빛을 발한 것이다. 임대료가 떨어지면서 유지비는 오히려 줄었고 인력시장이 넘쳐나면서 좋은 직원도 쉽게 뽑을 수 있었다.

남들이 허리띠를 졸라 매는 틈에 더욱 공격적으로 나섰다. 4세대 백신인 'V3 매니저'를 만들었고 PC 보안 제품인 '앤디'를 기획하는 등 백신에서 보안으로 사업 영역을 착실히 넓혀나갔다. 그 와중에 CIH 바이러스 대란이 터졌다. 99년 4월 26일 일이다.

CIH 대란은 행운?

"4월 25일부터 문의가 늘더니 26일에는 단 한 차례도 쉬지 않고 전화가 걸려왔어요. 직원이 40여 명이었는데 그 날부터 1주일 간 모두 고객 지원에 뛰어들어야 했지요. 화장실에 갈 시간도, 담배 한 대 피울 틈도 없을 만큼 긴박했지요. 하루 만에 전국적으로 30만 대의 PC가 먹통됐으니 말 그대로 대란이었죠."

전화 상담 외에 복구 서비스도 해야 했다. 복구를 받으려고 하루에 500명이 몰려들었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 벨소리와 밀려드는 사람들로 사무실은 북색통이었다. 대기업, 관공서, 군부대에서 하드디스크를 되살려 달라고 오는가 하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자료가 날아갔다며 울먹이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전에 없던 대란으로 백신 시장은 4배 이상 성장했지요. 남들은 이것을 행운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준비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회였지요.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는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지 않습니까?.

이를 계기로 회사는 기술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면서 국내 1위 자리를 단단히 굳혔다. IMF 시절 착실히 준비해 온 노력의 결실을 알차게 맛본 것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변화는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키는 열쇠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는 결코 제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2000년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는 안철수연구소로 거듭났다. 여기에는 백신 회사에서 보안 기업으로, 국내에서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는 그의 꿈이 담겨 있다.

네트워크가 지구촌을 뒤덮으면서 사이버 공격은 대단히 위험해졌다. 예전 바이러스처럼 시스템 몇 대를 망가뜨리고 끝나지 않는다. 기업이나 국가, 전체 네트워크 망을 뒤흔든다. 바이러스와 해킹의 구분도 모호해 그 폭발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안철수연구소가 '바이러스'대신 '보안'이라는 깃발을 높이 쳐든 이유는 그 때문이다.

세계 시장을 향한 발걸음도 바쁘다. 2000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해외 진출의 꿈은 최근 중국과 일본 수출길을 트면서 조금씩 성과를 얻고 있다. 일본에서는 PC용 V3의 핵심 기능만 담은 편의점용 제품이 톡톡히 재미를 봤고 앤디는 국내보다 반응이 더 좋다. 2002년 말 6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두 건이나 한꺼번에 성사시킨 중국에서도 자신감을 얻었다.

"발전 가능성이 어마어마한 중국도 중국이지만 일본은 다국적 기업이 장악하고 있어서 세계 진출을 노리는 우리에게 좋은 시험 무대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시장도 크지만 지금은 힘을 분산할 때가 아니지요. 중국과 일본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으면 세계 진출은 한결 수월해지겠죠."

책 읽는 게 최고의 즐거움

그는 나서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98년 초대 소프트웨어벤처협회 회장, 2003년 제5대 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성공한 CEO로서 자의반 타의반 책임을 떠안은 것이다. 요즘에는 기업체를 상대로 강의를 하고 정부기관에 자문을 해주느라 늘 시간에 쫓긴다. 그 와중에도 틈이 나면 책을 뒤적인다. "컴퓨터 책을 보면서 공부하는 게 최고의 즐거움"이라며 환하게 웃는 그는 영락없는 과학기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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