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강국 향한 10년 옹고집

[IT 인물열전-②] 로봇 축구의 세계적 권위자 KAIST 김종환 교수

등록 2004.07.19 13:18수정 2004.07.1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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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축구의 아버지’(더 타임스). ‘엔터테인먼트 로봇 분야의 개척자’(앵커리지 데일리 뉴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과 김종환 교수에 대한 세계 언론의 찬사다. 그가 97년 창설한 세계로봇축구연맹(FIRA)은 프랑스, 영국, 중국 등에서 100여 개 팀이 참가하는 세계적 행사로 자리 잡았다. 그 대가로 98년에는 세계인명사전에 수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최근에는 동남아 10개국에 로봇 축구를 전수하는 조건으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약속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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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일

축구광에서 ‘로봇 축구’ 전도사로

로봇 축구를 향한 김 교수의 집념은 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능형 로봇을 연구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문득 “로봇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로봇의 대중화가 기술 발전에 더욱 큰 힘이 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떠올린 게 ‘로봇 축구’다.

“누구나 좋아하는 축구를 이용하면 많은 사람들이 로봇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 여겼습니다. 사실은 제가 축구광이거든요. 어렸을 적 제법 찬다는 소리를 들었지요. 축구 규칙도 좔좔 꿰고 있습니다. 로봇 축구가 우연히 떠오른 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나 간단치 않더군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고통은 대단했습니다.”

경기 규칙은 어떻게 할 것인지, 경기장 크기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바닥에는 무엇을 깔 것인지, 공은 무엇으로 만들 것인지…. 해결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로봇이 자기 위치를 스스로 알아채는 것도 숙제였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카메라를 찍어 위치를 추적하기로 했다. 갖은 고생 끝에 7.5cm의 정육면체 로봇이 1.7×1.3미터 안에서 3대 3으로 편을 나눠 상대 골문에 공을 집어넣는 로봇 축구가 완성되었다. 그리곤 96년 첫 국제 대회가 열렸다. 10개국 24개 팀이 참여한 조촐한 행사였지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로봇은 차세대 핵심 산업으로 여러 나라가 연구하고 있지만 축구 경기를 만든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에요. 그래서인지 모두들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더군요. 그 중에서도 로봇 강국인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어요.”



드라마 <카이스트>를 통해 널리 알려진 로봇 축구는 전기, 전자, 물리, 통신을 아우르는 과학 기술의 결정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보다는 일본이 유리한 게 사실이다. 과학 기술과 연구 인력, 국민적 관심 등 부족한 게 없는 그들이다. 로봇 축구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한국에게 빼앗겼으니 땅을 칠 수밖에…. 김 교수와 일본의 악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쾌거

“한창 FIRA를 준비하고 있는데 일본에서 연락이 왔어요. FIRA를 자기들한테 넘기라는 내용이었지요. 한국은 역량이 안 되니 로봇 축구를 해봤자 소용없다, 그러니 일본에 통째로 넘기면 김종환 교수를 위원으로 넣어주는 선에서 체면을 살려주겠다, 이런 제안이었지요.”



과학자로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로봇 축구를 함께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길을 찾자고 간곡히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은 단칼에 거절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둔 시점이었어요. 일본은 부랴부랴 FIRA를 본 딴 ‘로보컵’을 창설하고 풍부한 자금을 앞세워 선수 층을 넓혀갔어요. 마침내 FIRA와 로보컵은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되었지요.”


프랑스 월드컵이 로봇 축구를 세계에 알리는 절호의 찬스라고 여긴 김 교수는 조직위원회와 끈질기게 협상해서 오프닝 행사를 따냈다. 2년간 줄다리기 끝에 개막 경기 전 로봇 축구를 선보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뛰어든 일본도 온갖 로비를 앞세워 어렵잖게 행사를 잡아냈다.

“다행인 것은 FIRA가 오프닝을 맡았다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각국 언론은 오프닝에 관심이 쏠리잖아요.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오프닝 만큼은 꼭 우리가 해서 성공해야 한다며 이를 악물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시범 경기가 끝난 뒤 세계 언론은 FIRA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김 교수는 미국 CNN은 물론 러시아 지방 TV, 독일 지방 라디오 등 수백 명의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한국의 로봇 축구가 미국 워싱턴부터 독일 지방 도시까지 세계 방방곡곡에 소개된 감격의 순간이었다.

일본과의 질긴 악연

98년 프랑스 월드컵을 통해 한국은 ‘로봇 축구’의 종주국으로 자리매김한 반면 오프닝을 놓친 일본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 그렇게 4년이 흘러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FIRA와 로보컵은 다시 맞붙었다.

“일본은 98년의 쓰라린 경험 때문인지 처음에는 개막식에 행사를 갖겠다고 우기더니 결승전 장소가 도쿄로 정해지자 갑자기 일정을 폐막식에 맞추는 상식 이하의 진행으로 눈총을 샀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예정대로 행사를 치렀고 다시 한번 지구촌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일본과의 얄궂은 인연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FIRA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그들은 딴죽을 걸었다. 김 교수가 처음 조직위원회 이름을 정할 때는 마이크로로봇의 M자를 따서 피마(FIMA)라고 했다. 그러나 마이크로로봇 대신 로봇이 들어가야 할 것 같아 M을 R로 바꿨다.

“그랬더니 왜 피마에서 피라로 바꿨느냐, ‘로봇’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고 우기더군요.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www.fira.net이라는 도메인을 미리 확보해놓은 덕분에 FIRA라는 이름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이렇게 작은 것까지 신경을 써가며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FIRA와 로보컵의 힘겨루기는 갈수록 치열하다. 일본은 각국에서 활동하는 주재원이 로보컵에 대한 홍보를 도와주지만 FIRA는 김 교수 혼자나 다름없다. 힘들고 외로운 싸움이다.

“그래서 IT를 적극 이용합니다. 9년째 ‘피라 뉴스’(FIRA news)라는 영문 소식지를 각국의 로봇 과학자와 공학도에게 보내고 있지요. 이것으로 로봇 축구의 종주국이 어딘지 확실하게 못을 박습니다. IT 강국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일본의 대대적인 오프라인 홍보에 맞서는 것이죠.”


로봇과 가까워지는 아이들

사실 일본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로봇 선진국이다. 혼다의 ‘아시모’는 2족 로봇의 선두 주자로 인정받고 있고 소니의 강아지 로봇 ‘아이보’는 세계적으로 10만대 이상 팔렸다.

96년에는 50억엔이라는 엄청난 예산을 들여 정부, 산업계, 학계가 로봇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2천여 개의 중학교가 ‘로봇 콘테스트’를 교과목으로 가르친다. 이런 분위기는 로보컵을 빠르게 발전시키는 버팀목이다. 97년 나고야에서 첫 대회가 열릴 때만해도 로보컵은 10개국에서 36개 팀이 참가했지만 지금은 30여 개국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로 거듭났다.

일본과의 경쟁이 두려울 게 없는 그이지만 로봇에 대한 일본 사회의 열정 만큼은 부럽기 짝이 없다. 우리는 로봇에 대한 관심이 이제 막 걸음마를 뗐다. 김 교수는 “기업은 재정적 지원이 적고 학교는 로봇 교육이 아쉽다”고 꼬집는다. 정부가 21세기 국가 경쟁력으로 밀어붙이는 ‘사이언스 코리아’도 매섭게 비판한다.

“과학 한국을 만들려는 의지는 인정하지만 실체가 없습니다. 중국에 자극받아 우주로 로켓을 쏘아 보내는 것만이 최고인줄 착각하는데, 우주인이 나오기까지 여건이 탄탄해야지요. 지금이라도 전국의 학생들에게 로봇을 나눠줘 직접 조립하고 프로그래밍하는 훈련을 시키는 게 사이언스 코리아의 참된 모습이 아닐까요.”


요란한 구호보다는 구체적인 실천이 과학 한국을 이끈다. 김 교수가 로봇과 학생들의 만남을 자주 갖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지난 5월 엑스포 과학 공원에서 열린 ‘스페이스 로봇 챌린지’ 전시회가 대표적이다. 초중고, 대학생, 지도교사 등 3천여 명이 참여하는 호황을 누리면서 로봇 강국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7월에 열리는 ‘로봇 올림피아드 전국대회’도 빼놓을 수 없다. 로봇 미로 찾기, 보행 로봇 장애물 경주, 계단 오르내리기, 로봇 응급 구조, 로봇 서바이벌 종목으로 이뤄진 이 대회는 11월 KAIST에서 열리는 국제로봇올림피아드(IROC)를 겨냥하고 있다.

“이런 행사를 통해 아이들이 로봇과 점점 가까워지는 게 중요합니다. 로봇을 움직이려면 전기, 전자, 물리 등 과학을 잘 알아야 하니까요. 과학 한국의 미래가 여기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정부와 기업, 교육 기관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이지요.”


유비쿼터스 로봇 창안

지난 5월 ‘스페이스 로봇 챌린지’ 대회에서 김 교수는 ‘유비쿼터스 로봇’이라는 주제로 열띤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원이 부족한 우리는 소프트웨어를 키워야 한다. IT 강국의 장점을 십분 살리면서 소프트웨어 기술로 경쟁하는 유비쿼터스 로봇이 한국의 미래”라고 주장했다.

유비쿼터스는 물이나 공기처럼 시공을 초월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뜻의 라틴어다. 이 말은 1988년 미국 제록스의 마크 와이저(Mark Weiser)가 ‘유비쿼터스 컴퓨팅’을 주장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마크 와이저는 1946년 나온 애니악처럼 중앙 서버에 여러 사람이 접속하는 1세대를 지나 한 사람이 PC 한 대를 쓰는 2세대를 거치면, 유·무선 네트워크를 통해 한 사람이 여러 대의 PC를 쓰는 3세대가 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교수가 주장하는 ‘유비쿼터스 로봇’도 비슷한 진화를 거친다. 1세대가 60년 대 산업용 로봇을 가리킨다면 2세대는 지금의 지능형 로봇을 뜻한다. 그리고 3세대는 영화 ‘매트릭스’처럼 네트워크에서 숨쉬는 가상의 인공 지능 로봇을 언제 어디서든 불러오는 것이다. KAIST 전기전자공학과가 지난 4월 선보인 ‘리티’는 유비쿼터스 로봇의 실체를 보여준다.

“사이버 공간에 사는 리티는 네트워크에 연결된 곳이라면 어디서든 불러올 수 있습니다. 사무실이나 집 안의 PC 뿐 아니라 노트북, 휴대폰 등 모든 디지털 장비에서 리티와 대화를 나누거나 도움을 받습니다. 두 팔, 두 발을 가진 물리적 로봇만이 로봇이 아닙니다. 네트워크 시대에는 리티와 같은 소프트웨어 로봇이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김 교수는 리티에 염색체 정보를 집어넣는 야심 찬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인간의 DNA를 이루는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시토신(C) 정보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입력하는 것이다. 그러면 리키는 인간에 더 가까워진다. 예를 들어, 휘파람을 불어주면 어떤 날은 즐거워하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짜증을 낸다.

“미래는 로봇 시대입니다. 한국은 일본이나 미국처럼 하드웨어가 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IT가 있습니다. IT 기반의 로봇으로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그 핵심이 유비쿼터스 로봇입니다.”


김 교수는 “국제 표준을 정하고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IT 강국인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로봇 시대를 서둘러 열어야 한다”며 “그것만이 하드웨어가 약한 우리가 머잖아 펼쳐질 로봇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라고 힘줘 말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로봇의 대중화가 절실하다. 결국 로봇 축구는 한국의 미래 경쟁력을 살찌우는 디딤돌이다.

“FIRA를 통해 세계 젊은이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친구가 됩니다. 진정한 세계화는 바로 이런 것이지요. 우리 것으로 세계인이 하나가 되는 것 말입니다. 피파(FIFA)가 영국에서 생겼다면 피라는 한국이 종주국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로봇 세상에서 후손들이 느끼는 자부심은 대단할 것입니다.”


로봇 대중화에 앞장선 지 어느덧 10년. 로봇 강국을 향한 김 교수의 열정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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