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 앞에서 부르는 밥의 노래

(책으로 읽는 세상 2)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

등록 2004.07.05 17:33수정 2004.07.0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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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각의나무
육이오,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 이태백.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 고유명사들이지만 이 단어들을 일렬로 쭉 늘어놓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육이오의 총구는 '62세까지 직장에 남아있는 적'들을 향하고 있으며 부산 앞바다의 오륙도는 느닷없이 '56세까지 일한 도둑'으로 변모한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야릇한 괴물인 사오정은 '45세에 정년'을 맞는 직장인들로 둔갑하고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삼팔선은 '38세까지 일하면 선선히 물러나야'하는 직장인들 최후의 저지선이 된다.

그리고 달밤에 배를 띄우고 음풍농월하던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은 '이십대 태반이 백수'인 이 나라 젊은이들의 자조적인 별명이 된다.

갈수록 힘들고 어려워지는 밥벌이의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이 단어들 앞에서 나는 마음이 쓸쓸하다. 그 쓸쓸한 마음 한가운데는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밥을 먹어야만 하고 밥을 먹기 위해서 밥을 벌어야만 하는 우리 삶의 조건에 대한 깊은 연민이 담겨 있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 사이에 펴낸 산문집의 제목을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정하면서 김훈이 "덜 삭은 슬픔이 창자를 씻어 내린다"고 쓴 이유 역시 이러한 연민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평생 밥이라는 낚싯바늘에 아가미가 꿰어 밥 쪽으로 끌려가는 우리 삶에 대한 연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 올리는 자 역시 사실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우쳐 줌으로써 그 연민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은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되는 진저리나는 밥 앞에서 부르는 '밥의 노래'다. 그 노래에는 어쩔 수 없이 연민이 스며들어 있지만 그 연민에 굴복하지 않는 '몸'의 건강함이 있다.

"나는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다. 나는 일이라면 딱 질색이다"라고 그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2.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먼저 결핍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밥벌이를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것은 식물들과는 달리 엽록소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랜 세월 인류의 밥벌이를 책임져 왔던 남성들을 규정하는 남성성의 본질 역시 결핍으로 이해한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밥벌이 수단으로 인간이 사용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몸인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고대인들과는 달리 그렇게 해서 벌은 밥을 넘길 수가 없을 정도로 자신의 몸을 부려야만 한다는 점에 밥벌이의 비극이 있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가기 위해 김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것이다. -35쪽-

어쩌다가 우리의 밥벌이가 이 지경이 되어 버렸을까. 그의 다른 글들을 읽어보면 이것은 화폐 경제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만물에 대한 포괄적인 구매력을 행사하는 돈이라는 기호가 밥이라는 실물을 대신하면서 사람들의 욕망이 끝이 없어진 것이다. 그 욕망을 더욱 극대화한 기호가 바로 신용카드다.

이처럼 밥 대신에 기호가 거래되는 세상 속에서 밥은 이제 더 이상 자연 속에 있지 않다.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인간의 세상 속에서 내 밥과 네 밥은 서로 뒤엉켜 있다. 그러니 치열한 경쟁이 없을 수가 없다.

밥벌이가 고통스럽고 지겨운 일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는 밥벌이를 위한 우리의 노동은 나를 나 자신에게서 소외시킬 뿐이다. 일은 내 몸을 내게서 분리시킨다. 밥벌이에서 노동의 신성함이나 일하는 신명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나는 일할 때도 있었고 놀 때도 있었지만 놀 때 인간이 온전해지고 깊어지는 걸 느꼈다.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같이 보이는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거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264쪽-

그가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강변을 달리는 것은 세계에서 소외된 인간의 몸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나름의 눈물겨운 시도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라는 소설로 구체화 된 바 있는 무기(연장)와 악기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이 인간의 몸의 일부로 세계 속에서 온전하게 기능할 때 그 세계는 비로소 변모의 가능성을 품게 된다.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몸의 회복과 함께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관계의 회복이다. 선원들의 밧줄, 암벽 등반가들의 자일, 소방관들의 소방 호스처럼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밧줄과 같은 아름다운 협력의 관계를 우리의 세상 속에서 구현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연결됨으로써, 인간은 개별적 존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수행해낼 수 있다. 그것이 밧줄의 아름다움이다. (중략) 나는 최초로 끈을 발명한 인류의 선배를 상상할 수 있었다. 끈과 밧줄을 발명한 인간은, 인간의 몸과 노동을 외계 속으로 그리고 다른 인간의 몸속으로 확대시키고 연관시킨, 위대한 선구자일 것이다. 173-174쪽

그 밧줄은 단독자로서의 인간과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밧줄인 동시에,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는 밥의 개별성과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한다는 밥의 보편성, 그 양쪽을 모두 끌어안는 밧줄이기도 하다.

3.

지난 주말부터 본격적으로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었다. 일하는 시간은 줄고 노는 시간이 늘었다. 그렇지만 일하는 시간이 줄었다고 해서 과연 밥벌이의 지겨움도 그만큼 줄어 들었을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이 질문에 김훈은 이렇게 답한다. 깊이 새겨볼 말이다.

그런데 노는 거, 그게 말이 쉽지 해보면 어렵다. 놀면서 돈 쓰고 돌아다니는 거는 돈 버는 노동세계와 연결돼 있어서 노는 게 아니다. 노는 거는 그 자리에 있는 세상하고 단둘이 노는 거다. -264쪽-

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생각의나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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