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넌지시 들여다보게 하는 책

장일순의 일화 모음집 <좁쌀 한 알>

등록 2004.07.08 00:24수정 2004.07.0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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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 표지

책 표지 ⓒ 도솔

책을 읽는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책이 내 얘기를 할 때다. 책 속의 남 얘기가 실은 내 이야기일 때 눈을 번쩍 뜨고 결말이 어떻게 되나 호기심도 커진다.

장일순을 찾아 온 사람이 있었는데 아무리 독촉을 해도 돈 꿔간 사람이 갚지도 않고 만날 때 마다 말을 바꾼다는 것이다. 법으로 처리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소장을 낼 준비를 다 하고서 마지막으로 장일순을 찾아 왔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영락없는 내 얘기다. 생면부지의 전라도 땅으로 귀농하여 농사짓고 살다가 사기를 당해 경매에 넘겨진 내 밭을 찾느라 몇 년 째 가슴앓이를 하다 소장을 준비하고 있는 터였다.

감히 장일순 선생에게 법적인 묘수를 기대한 건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대뜸 한다는 말이 "너 그 돈 없으면 죽니?"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할 말이 없어진다.

내 억울한 처지를 위로하기는 커녕 "너 그 돈 없어도 살지 않니? 지금 네 말대로 하면 그 사람 죽는다. 그러면 너는 발 뻗고 자겠냐?" 고 도리어 사기 친 사람을 두둔하는 게 아닌가.

나를 등쳐먹은 그 사람이 사과라도 했다면 솔직히 나는 그냥 넘어 갈 수도 있겠다고 장일순에게 항변해 봤지만 장일순은 끄떡도 없었다.

"그 사람이라고 속이 편하겠냐. 그 사람도 발 뻗고 못 잘 거다, 아마. 없는 돈이다 생각하고 너나 편히 자거라."


그렇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속여먹고는 히죽거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장일순은 그 사람의 양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물론, 동네 사람들이 다 나를 어수룩하다고 흉볼 거라고 여기고 있지만 장일순은 그 때문에 내가 밥을 굶으면 쌀값을 대 주겠노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본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것이다. 믿고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보다 더 혁명적인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책을 읽는 즐거움은 진정 어디서 오는가. 책을 통해 내 고단한 삶이 이처럼 한 깨우침을 맞을 때다.


지난 5월로 돌아가신지 10주기가 되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일화들을 모아 놓은 책 <좁쌀 한 알>(최성현. 도솔출판사. 9800원)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여럿이 길을 가다가 생긴 일이다.

"선생님은 맨 날 우리보고 밑으로 기라고 하시면서 정작 선생님은 안 기시잖아요?”라고 불쑥 한 사람이 볼 부운 소리를 했나보다. 모든 사람들이 긴장된 호기심으로 선생을 바라봤다. 이때 선생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맨 땅에 무릎을 꿇고 그 젊은이에게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한번은 선생이 사시던 강원도 원주에서 큰 전시회가 열렸다. 붓글씨와 문인화로 꽤 유명하신 선생의 작품 안내판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글씨 장일순, 석각 김진국, 받침대 김진성 이렇게 쭉 쓰여 있었다. 선생의 작품은 다 그랬다. 먹즙은 누구이고 목공은 누구이며 표구는 누가 했는지가 함께 쓰여 있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원주시장이 작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 선생은 이름 적혔던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서 일일이 소개 했다. 평생 목수나 석수장이로 산 그 사람들은 높은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이토록 극진히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좁쌀 한 알>속에는 명예나 권세로 전혀 치장되지 않고 자유인으로 살았던 큰 스승이 들어있다. 그를 회상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랬다. 장일순을 누구의 이야기나 잘 듣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얘기를 들을 때는 그가 100% 말하는 사람이 되어 들어 준다는 것이다. 자신의 최대치로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라고 한다. 버리고 버리고 다 버리니 거기에 모든 게 다 있더라고 하는 사람이 바로 장일순이다.

집으로 찾아온 제재소 사장 최병하와 얘기하는 도중 장일순은 “너나 나나 다 거지다.”고 말 했다. 길거리 거지는 깡통 놓고 행인들한테 얻어먹는 것이고 최병하는 제재소 차려놓고 손님한테 얻어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장일순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하나님이 누구인가. 거지에게는 행인이 하나님이요. 목사에게는 교인이, 대통령에게는 국민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식당주인은 밥 먹으로 오는 손님들을 하나님처럼 대접해야 한다고 했다. 모두가 서로에게 하나님이고 스스로가 다 하나님이라는 주장이었다.
책은 장일순의 주장보다 생활이 담겨있다.

a 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장일순 선생의 생전의 모습 ⓒ 전희식

따스하고 감동적인 장일순 선생의 일화들은 종교적인 선행이나 봉사와는 다르다. 삶에 대한 깊고 소중한 깨우침으로 다가온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면서도 개인의 일상을 어떻게 챙겨가야 하는지를 일러주고 있다. 개인의 수양과 사회적 의식이 함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내 보일 수 있는 가르침들이다.

장일순이라는 이름 석자가 생소한 사람들도 70년대와 80년대 초반에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이 원주에서 벌인 민주화 운동은 기억 할 것이다. 바로 그 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장일순 선생이라고 보면 된다. 유기농 직거래 생활협동조합인 ‘한살림’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책에서는 장일순의 붓글씨와 문인화를 함께 보게 되는데 글이 쉬우면서도 의미는 크다. 그러나 정작 장일순은 이 모든 글씨와 그림들을 ‘붓장난’이라 부르고 길거리 포장마차에 쓰인 맞춤법마저 틀린 ‘군고구마 팝니다.’나 ‘붕어 빵’이라는 글이 정성과 간절함이 배인 살아있는 글이라고 말하곤 했다 한다.

300쪽이나 되는 책이 다 장일순선생과 있었던 일화들로 되어 있다보니 등장인물이 근 100여명이나 된다. 책 속에서 아는 사람 한 둘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책 읽는 재미가 된다. 재 작년에 전남 승주군에 사시는 자연농업의 선구자 한원식선생님을 자택에서 뵈었을 때 장일순 선생 그거 순 엉터리라고 큰 소리 치셨던 분인데 이 책 속에서 다른 일화로 소개되어 있어 반가웠다.

책을 쓴 최성현 선생은 현재 농부로서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자연농법>이라는 책을 번역하신 분으로 이 책은 오래전부터 겉장이 다 닳도록 내 농기구 옆에 있다가 지금은 귀농 한 후배들 책꽂이를 순회하면서 영농지도를 하고 있다. 장일순의 삶과 철학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 사람이 쓴 책이라는 점도 주목 할 부분이다. 10여년에 달하는 두 사람의 교분도 큰 몫을 차지한다.

인간 장일순이 완성되기까지 간단치 않은 곡절이 있었을 터인데 그것이 충분히 소개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그러나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생전에 이런 장일순 선생을 한번이라도 뵙지 못한 것이 더 큰 아쉬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돌아가시고 나서야 뒤늦게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지 모르겠다. 다석 유영모선생이나 조영래 변호사, 계훈제선생, 청하스님, 그리고 작년에 돌아가신 무교회 운동의 선구자 노평구 선생 등. 인생의 큰 스승들이시다.

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도솔,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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