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문학 여행'을 떠나요

[박소영의 독서이야기- 40] 곽재구의 <예술기행> 외 2권

등록 2004.07.10 09:52수정 2004.07.1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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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비로 집안은 눅눅하고 빨래는 쌓여 있다. 창가에 '타타타' 종이 타 들어가는 소리처럼 간간이 비가 내린다. 아, 이 장마의 끝은 어딜까? 달력에 시선이 가고 동그라미가 쳐진 날짜를 본다.

'휴가', 작년부터 휴가를 챙기기 시작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지나온 시간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때는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게 그 이유다.


둘 이상 떠나는 여행은 사실 여행이라고 하기엔 좀 뭣하다. 더군다나 어린아이가 동반된 여행이라면…. '그래, 이번에는 어찌하든지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하는 거다.' 어려운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여행 계획을 세운다. '과연 내가 어디를 가고 싶어하는 걸까.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 걸까.'

고심하다 책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여행 관련 책의 홍수 속에서 세 권의 책을 건져 올렸다. 윤대녕님의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곽재구님의 <예술기행>, 최재봉님의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이 그것이다.

이들 세 권의 책은 한결같이 개별적인 인간이 집요한 정신의 세계 곧 '예술'의 경지에 이른 공간을 문학적으로 그린 산문집이다.

젊음의 고뇌가 아름답다

윤대녕의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표지
윤대녕의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표지문학동네
윤대녕의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은 한 여자와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그녀에게 띄우는 편지글 형식을 빌려 쓴 산문집이다.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 같은 스토리를 가진 점에서 다른 책들과 구분된다. 무엇보다 이미 '연애'라는 낭만적 이름과 동떨어진 내게 다소 들뜬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여성적인 섬세한 감성에 흠뻑 젖어 들어, 마침내 한껏 주체 못할 감정의 겹에 자연히 여행을 떠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확실하게 여행에 동기를 부여하는 책이다.

왠지 일본의 '하루키'와도 이미지가 비슷하다. 그건 아마도 음악과 젊음, 고양이, 회,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 그런 것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끼의 엽기적 판타지와는 구별되는 차분함이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때 '젊음'을 이토록 아름답고 절절하게 그려주는 작가는 보기 드물지 싶다. 무릇 그 시절이란 내밀한 자신의 정체감, 즉 존재감에 대해 끝없는 고뇌로 사투를 벌이는 때다. 다시 한 번 혼자만의 은밀한 고립을 원한다면 이 책이 다정한 안내자가 돼 줄 것 같다.

'진정한' 여행자와 함께 떠나자

곽재구의 <예술기행> 표지
곽재구의 <예술기행> 표지열림원
곽재구의 <예술기행>은 그의 전편(前篇)인 <포구기행>과 많이 닮아 있다.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이란 부제가 보여주듯 시인이 그리워하는 '예술의 거장'의 흔적과 그들의 원류를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다.

'세상의 가장 부드러운 이불자락인 섬진강의 모래를 등에 지고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은 그대로 램프의 꽃밭이었다.'

첫머리에 쓰여진, 이 아름다운 한 문장을 계속 되뇌며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가 얼마나 고운 눈을 가진 사람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성복, 신동엽, 정약용, 김환기, 박인환, 이청준, 한승원, 윤이상 등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예술가들의 삶의 한 자락을 실감하게 된다. 시끌벅적한 이러저러한 문학 답사가 아닌, '여행가'라는 또 다른 직함이 어울릴 듯 도처에서 그 지방의 옛 정담들을 풀어 인연의 고리들을 펼치는 재주를 만나는 것 또한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다.

동네 미용실에서 죄다 같은 모양의 파마 머리를 한 시골 아낙들, 육자배기를 구성지게 풀어 차의 맛을 한껏 달구는 카페 여인, 칠순이 다 되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예쁜 귀를 가진 진도의 소리꾼 할머니…. 거기 '사람'이 있어 삶이, 문학이, 예술이 떳떳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행의 참맛을 농익게 전해주는 곽재구 시인, 그를 만나는 것은 여행의 본질을 다시금 묻는 '마음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문학의 의의를 수확하자

최재봉의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표지
최재봉의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표지한겨레
마지막 책은 최재봉(<한겨레> 문학전문 기자)의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이다.

동학혁명의 발상지인 전라도 고부 땅에서부터 거대한 주차장이 되기 일쑤인 서울의 압구정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학 역사가 실타래처럼 이어지는 산문집이다.

안도현의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부터 1990년대의 황폐한 소비 욕망을 드러내는 유하의 시까지 43편의 시와 소설의 공간을 선정하여 실었다.

문학기자로서 개인적인 평론을 담아 문학사의 의의를 밝히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촘촘히 짜여진, 문학이라는 그물을 손에 쥐는 횡재의 기분도 느낄 수 있다. 특히 학창시절에 읽었던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다시 들춰보는 계기도 마련해 주었다.

그런 점에서 김승옥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는 '개인의 발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0년대까지의 한국 소설은 말의 올바른 의미에서 개인의 존재에 눈뜨지 못했었다. 소설이 개인에 관해 말할 때조차 그 개인은 공동체의 역사와 현실에 절대적으로 규정되는 사이비 개인이었다.

김승옥 소설은 또한 새로운 세대와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감수성으로써 두드러진다. 혁명으로까지 일컬어지는 그 감수성은 사물에 대한 상투적인 인식을 거부하고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봄으로써 결국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줄 수 있게 된다. '무진기행' 중 안개를 묘사한 저 유명한 대목을 읽어보자.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본문 중에서)


좀더 집중적으로 우리 문학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윤대녕 지음,
문학동네, 2000


곽재구의 예술기행 -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곽재구 글, 정정엽 그림,
열림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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