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마! 우리는 와 강냉이로 안 심노?"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74> 강냉이

등록 2004.07.12 13:18수정 2004.07.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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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수염을 바라보면 긴 머리 나폴거리며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쏘옥 숨던 그 가시나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 가시나의 머리도 염색을 했으면 이와 꼭 같았으리라
옥수수 수염을 바라보면 긴 머리 나폴거리며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쏘옥 숨던 그 가시나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 가시나의 머리도 염색을 했으면 이와 꼭 같았으리라이종찬

내가 태어나 자란 창원군 상남면 동산부락에는 옥수수가 아주 귀했다. 우리 마을사람들은 곳곳에 텃밭과 다랑이밭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옥수수는 잘 심지 않았다.


앞산 가새와 뒷산 곳곳에 다랑이밭을 몇 마지기나 가지고 있었던 우리집에서도 옥수수는 좀처럼 심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는 주로 고구마와 무, 배추, 열무, 상추, 고추, 파, 호박 등을 많이 심었다.

하긴, 우리 마을사람들이나 부모님께서는 애써 가꾸어 보아야 자리만 많이 차지하고 몇 개 달리지 않는 옥수수보다 다른 먹거리를 심고 가꾸는 게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어릴 때 가끔 시장에 갔다가 알갱이가 촘촘히 박힌 노오란 옥수수를 바라보면 절로 침이 꿀꺽 하고 넘어갔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바라보면 더 갖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 당시 우리 마을에서도 옥수수밭이 꼭 한군데 있긴 있었다. 좀처럼 보기 드물었지만. 그 옥수수밭은 그 가시나가 살고 있는 탱자나무 울타리 바로 옆에 사는 백씨 아저씨의 텃밭에 있었다. 그 옥수수밭은 내가 학교를 마친 뒤 소를 몰고 소풀을 베러갈 때 늘 지나치는 길목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옥수수를 넘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옥수수밭은 백씨 아저씨 집 싸리대문 울타리 옆에 있어서 수시로 백씨 아저씨네 가족들이 들락거렸다. 게다가 백씨 아저씨 집은 담장이 낮고 안채가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밖에서 보아도 안채 마루까지 훤하게 보였다.


내 어릴 적 있었던 옥수수밭도 이 사진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내 어릴 적 있었던 옥수수밭도 이 사진과 비슷한 풍경이었다이종찬

잘 자라고 있는 옥수수
잘 자라고 있는 옥수수이종찬

"옴마! 우리는 와 강냉이로 안 심노?"
"와? 강냉이가 그리도 묵고 싶나?"
"내는 강냉이로 배 터지게 한번 먹어보는 기 소원이다."
"강냉이 그거는 암만 많이 묵어도 배만 부르지 살이 하나도 안 찌는 기다. 앙코 없는 찐빵 같은 기 강냉이 아이가. 그라이 뭐 한다꼬 애써 강냉이 농사로 지을끼고."


그랬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을 뺀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지만 그 당시에만 하더라도 어르신들은 자식들이 통통하게 살이 찌는 게 소원이었다. 오죽했으면 남양유업과 문화방송이 공동으로 '전국우량아선발대회'까지 했겠는가. 그랬으니 그 당시에는 다이어트에 좋다는 옥수수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만한 그런 음식이 아니었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그때 나는 노오란 옥수수를 배부르게 한 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동무들도 그랬다. 옥수수가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백씨 아저씨 집에서 옥수수를 다 수확하고 나면 나와 동무들은 서로 째려보며 마른 옥수수대를 마구 꺾다가 마침내 서로 얼싸안고 싸움박질까지 했겠는가.

옥수수대는 입에 넣고 칡처럼 씹으면 달착지근한 물이 나왔다. 그때 나는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앉아 소풀을 베면서도 옥수숫대를 이가 아프도록 질겅질겅 씹었다. 그리고 아까 싸움박질을 한 그 동무와 함께 소처럼 옥수숫대를 씹다가 서로 마주 바라보며 배를 잡고 깔깔거리기도 했다.

"아나! 쪼매 뜨거벌(뜨거울) 끼다."
"우와! 이 귀한 기 오데서 났더노?"
"울 옴마가 품삯 대신 백씨 아지메 집에서 따 온 기라 카더라."
"애끼났다가(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숙제 함시로(하면서) 묵으모 안 되것나."
"강냉이는 금방 삶았을 때가 몰캉몰캉한 기 진짜 맛 있다카이. 그라고 애끼다가 잘못하모 똥이 되 삘(버릴) 수도 있는기라."


옥수수 꽃
옥수수 꽃이종찬

옥수수밭에 서면 나도 모르게 어릴적 향수에 젖는다
옥수수밭에 서면 나도 모르게 어릴적 향수에 젖는다이종찬

그날, 탱자나무집 가시나가 볼우물을 예쁘게 지으며 내게 내민 것은 금방 삶은 따끈따끈한 강냉이었다. 근데 그날따라 그 가시나는 나더러 자신이 보는 앞에서 달착지근한 내음이 풍기는 그 강냉이를 먹으라고 은근히 재촉했다. 아마도 그 가시나는 강냉이를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자기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가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동안 그 가시나가 가끔 내미는 여러 가지 과일이나 맛난 음식들을 그 가시나가 보는 앞에서 먹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때 나는 그 가시나가 맛난 먹거리를 주면 늘 집으로 가지고 와서 앉은뱅이 책상 서랍 속에 숨겨 두었다가 그 가시나가 생각날 때마다 아껴가며 먹었다.

그 가시나도 그랬다. 그 가시나도 내가 무슨 먹거리를 주면 쌍꺼풀 예쁘게 진 한쪽 눈을 찡긋하며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사라지곤 했다. 달팽이를 살짝 건드리면 금세 자기 집 속으로 쏘옥 사라지듯이 그렇게. 그래. 그 가시나도 나처럼 가끔 내 생각이 날 때마다 내가 건네준 그 맛난 먹거리를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날 나는 그 가시나가 보는 앞에서 그 가시나의 가지런한 이빨처럼 촘촘히 박힌 그 강냉이 서너 개를 몽땅 다 먹어야 했다. 그날따라 유별나게 이빨 사이에 쫀득쫀득하게 달라붙는 그 달착지근한 강냉이는 정말 맛이 좋았다. 그 가시나도 내가 강냉이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몇 번이나 눈웃음을 치곤 했다.

마디마다 하나씩 열리는 옥수수
마디마다 하나씩 열리는 옥수수이종찬

옥수수대를 씹으면 달착지근한 물이 나온다
옥수수대를 씹으면 달착지근한 물이 나온다이종찬

"아!"
"깜짝이야."
"으~"
"옴마야, 갑자기 와 그라노? 강냉이에 돌이 박힌 것도 아일끼고(아닐 것이고)?"
"으~"


그랬다. 그때 나는 썩은 이가 몇 개 있었다. 그중 오른쪽 어금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나를 몹시 괴롭혔다. 특히 엿이나 딱딱한 음식을 먹다가 잘못하여 오른쪽 어금니를 부딪치면 이가 몹시 아팠다. 또한 한번 그렇게 통증이 시작되면 일주일 이상을 고생해야만 했다. 게다가 자고 일어나면 볼이 마치 입 속에 눈깔사탕을 넣은 것처럼 심하게 부풀어올랐다.

근데 그날 그 가시나가 보는 앞에서 그 맛난 강냉이를 허겁지겁 먹다가 강냉이 알갱이 하나가 그만 그 썩은 어금니 속에 깊숙이 박혀버린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오른쪽 볼을 감싸쥐고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 가시나의 깊숙한 눈동자에서도 이내 동그란 눈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큭큭큭! 문디가 따로 없다카이."
"문디 가시나. 내는 시방 이도 아푸고 볼따구까지 붓어가꼬 부끄러버(부끄러워) 죽것거마는 니는 뭐가 좋다꼬 자꾸 킥킥거리쌓노. 이기 다 그 강냉이 때문에 그래 된 줄도 모르나."
"큭큭큭! 아나!"
"이기 뭐꼬?"
"아스피린이다. 밥 묵고 난 뒤에 한 알씩 묵거라. 그라모 이 아푼 것도 금방 낫고, 니 볼떼기에 붙은 눈깔사탕도 금방 다 녹을끼다. 큭큭큭!"


'날 따라오지 마' 하며 돌아서다가도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려 '뭐해 빨랑 따라오지 않고' 하며 나를 빤히 쳐다볼 것만 같다
'날 따라오지 마' 하며 돌아서다가도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려 '뭐해 빨랑 따라오지 않고' 하며 나를 빤히 쳐다볼 것만 같다이종찬

강냉이, 즉 옥수수는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처음 재배했다고 한다. 그 뒤 16세기 초에 포르투갈 사람들에 의해 중국에 전해지게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처음 수입되었단다.

강냉이란 이름도 강남(江南, 중국의 양자강 이남) 땅에서 건너왔다고 하여 '강남이'로 불리다가 나중에 '강냉이'로 바뀌어졌으며, 옥수수는 알갱이가 구슬 같다고 하여 '수수'에다 '옥(玉)'자를 붙힌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래. 요즘도 나는 우리집 텃밭 주변에서 쑤욱쑥 자라고 있는 강냉이의 예쁜 수염을 바라보면 긴 머리 찰랑거리며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쏘옥 들어가던 그 가시나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촘촘히 박힌 강냉이 알갱이를 바라보면 '아나' 하고 금방 삶은 강냉이를 내밀던 그 가시나의 가지런한 이빨과 까만 눈동자에서 톡, 하고 떨어지던 그 동그란 눈물방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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