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화분에 빨간 고추가 있었네

용산역 철길옆 주택가 골목을 돌아보고

등록 2004.07.14 16:34수정 2004.07.1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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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화분속에서 자라난 탐스러운 야채들 _ 왼쪽위부터 고추, 도마토, 대추, 고추

화분속에서 자라난 탐스러운 야채들 _ 왼쪽위부터 고추, 도마토, 대추, 고추 ⓒ 이인우

화분에는 예쁜 꽃들을 심는다. 그래서 이름도 꽃을 담는 그릇이란 뜻의 화분(花盆)이다. 그런데 요즘 화분은 아름다운 꽃뿐이 아니라 관상을 위한 나무는 물론 각종 야채를 심는 텃밭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도시의 큰길을 한발자국 들어가 주택가 골목으로 향하면 과일과 야채를 심은 화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a 대문옆으로 나란히 놓여진 화분들

대문옆으로 나란히 놓여진 화분들 ⓒ 이인우

희뿌연 날씨가 지속되는 2004년 7월 나는 새롭게 민자역사로 거듭나고 있는 용산역 근처의 주택가 골목을 찾았다. 시멘트로 포장되어 채 2m도 안 되는 골목길마다 대문을 기준으로 양옆으로 놓인 화분들을 볼 수 있었다. 그 곳에는 고추와 파, 토마토, 상추, 깻잎, 고 채송화, 나리꽃 등을 심어놓은 가지런한 화분들만이 한적한 골목길을 지키고 있었다.

용산역 철길 근처의 주택가는 대부분 단층 주택가로 일제 시대 때 형성된 그대로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골목을 마주하고 있는 주택들의 일부는 아주 오래 되어 보였다. 이러한 건물들을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대문 옆으로 놓인 갖가지 야채와 꽃을 심은 화분의 행렬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시멘트로 덮인 회색빛 골목을 푸르른 색으로 채색하고 있는 고추를 심은 화분을 통해 골목 사람들의 부지런함과 작은 것을 소중히 하는 우리 어머니들의 손길이 느껴진다. 골목을 이루는 벽에는 작은 사다리들이 놓여 있었는데 이는 대문과 지붕에 올려놓은 화분들을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계단이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넓게 활용하고 있는 골목안 사람들의 지혜는 끝이 없어 보였다.

a 골목길에  화분이 놓인 풍경

골목길에 화분이 놓인 풍경 ⓒ 이인우

성인 두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넓이의 골목에는 대문을 비켜서 의자가 놓인 곳도 보였는데 아마도 저녁이 되면 앞뒷집의 아주머니들이 골목으로 나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아닌가 싶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골목 입구에 켜진 가로등의 불빛과 하늘의 달빛을 조명삼아 화분에 심어놓은 고추며, 상추며, 토란잎을 만지며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a 나무상자에 키워지고 있는 <파>

나무상자에 키워지고 있는 <파> ⓒ 이인우



a 담밑에 돌담으로 화단을 만들고 상추를 심어놓은 풍경

담밑에 돌담으로 화단을 만들고 상추를 심어놓은 풍경 ⓒ 이인우




a 싱싱한 빨간 고추가 익어가는 화분이 놓인 풍경

싱싱한 빨간 고추가 익어가는 화분이 놓인 풍경 ⓒ 이인우



a 고추와 토란을 심은 화분

고추와 토란을 심은 화분 ⓒ 이인우

골목은 온통 시멘트로 봉합되어 흙이라고는 화분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골목 안 주민들은 화분에 흙을 넣고 그곳에 고추, 상추, 파를 심어 필요한 만큼 재배를 해서 소중한 유기농 채소를 키워내고 있다. 골목의 화분으로 만든 텃밭풍경은 풍성하다. 주말 저녁에는 온 가족이 모여 손수 키운 상추와 파, 깻잎, 잘 익은 고추와 함께 삼겹살을 구워먹는 저녁풍경이 그려진다.

a 이끼가 붙은 담장 밑으로 자라나는 잡초의 모습

이끼가 붙은 담장 밑으로 자라나는 잡초의 모습 ⓒ 이인우

오래된 돌담 아래는 파란 이끼가 가득했다. 또 골목길과 담 사이에는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잡초가 시멘트 사이를 비집고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자라고 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뽑힐 운명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골목의 화분들과 나란히 자신을 뽐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a 꽃이 지고 있는 봉숭화 화분

꽃이 지고 있는 봉숭화 화분 ⓒ 이인우

이곳 골목에 사는 어린 꼬마의 손톱을 빨갛게 물들여주고 그 생을 마감했을 법한 봉숭화 화분이 놓인 골목 끝 마지막 집 앞을 지나 골목길을 나오니 오는 가을에 문을 연다는 용산 민자 역사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난다.

머지않아 용산역 주변 일대가 대규모로 재개발 된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내가 보고 느낀 용산 주택가의 골목 풍경도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겨질 것이다. 생각이 여기 미치자 다시 한번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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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그리고 조선중후기 시대사를 관심있어하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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