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시만 보고 돌은 안 봐요"

방학은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백과도 같습니다

등록 2004.07.19 23:11수정 2004.07.20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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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돌

ⓒ 안준철

학교 근처에
숯불갈비 식당이 하나 있지
그곳은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돌들이 먼저 와 있었어

석공들은
사람을 얼싸안듯 돌을 껴안더니
웅크린 몸을 지렛대 삼아
한 우주를 번쩍 들어올리곤 했지

돌 정원이 완성되자
가장 큰 돌 위에는 식당 간판이 세워졌어
마치 되새김질하는 동물의 몸통처럼
제법 품이 너른 돌에는
글자 한 자 새겨져 있지 않았지

나는 식당주인에게 말했어
돌의 여백에 시를 쓰고 싶다고
식당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을 하더군

"그러면 사람들이 시만 보고 돌은 안 봐요."

그 뒤로
식당 앞을 지날 때마다
돌을 찬찬히 들여다보곤 했지
하마터면 시에 가려
지나칠 뻔한 돌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곤 해
그 위에
아무 것도 써 있지 않은
아이들의 맨 얼굴을.

-자작시 '돌'


세상을 살다보면 이곳 저곳에서 많은 스승을 만납니다. 그날 저를 부끄럽게 만든 식당 주인도 저에게는 훌륭한 스승인 셈이지요.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닌, 돌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해준 것도 고맙지만 아이들에게 덧씌워진 이런 저런 조건이 아닌 그들의 생명 그 자체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것은 더욱 귀한 일이지요.

그런가 하면, 돌과 몸이 하나가 되는 요령과 혼신의 힘으로 자신의 몸집보다도 더 커 보이는 돌을 번쩍 들어올리곤 하던 석공들도 제게 아이들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준 더없이 훌륭한 스승님들입니다. 그분들은 '사람을 얼싸안듯' 돌을 껴안았는데, 그동안 저는 사람을 돌을 대하듯 함부로 상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도 저는 식당 앞을 지나갈 때마다 마치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편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돌 앞에 잠깐 서 있다 가곤 합니다. 그 시간은 지나온 시간을 되새김질하는 사유의 시간입니다. 점수에 가려 아이들의 참모습과 마주치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시간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락도 없이 함부로 남의 여백에 그림을 그려버린 것을 뼈아프게 후회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a 돌

ⓒ 안준철

이제 곧 방학입니다. 제가 잘 아는 선생님은 해마다 방학이 되면 한동안 몸이 아팠다고 합니다. 한 학기 동안의 피로가 누적되어 잠시 쉬라는 몸의 신호였겠지요. 그런데 요즘은 방학이 되어도 몸이 아프지 않다고 합니다. 방학이 선언되기가 무섭게 강도 높은 보충수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방학이 되어도 아이들은 방학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하는 보충수업을 받는 것만으로도 이미 진이 다 빠져 버리기 때문이지요. 올해 0교시를 폐지한 학교 중에는 그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서 방학중 보충수업을 한 달 내내 강행하는 학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바로 그런 이유를 들어서 0교시를 다시 부활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참 딱하고 어이가 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대화 속에 학생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0교시나 방학 중 보충수업은 학생의 자유의사에 따라 하도록 되어 있는데도 아무도 그들의 의사를 묻거나 존중해주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만큼, 그리고 이런 정당하고 다급한 지적들이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잠꼬대로 들릴 만큼 우린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방학은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돌의 여백과도 같습니다. 그 여백에 미숙하고 서툴지만 자기 그림을 그려보는 연습의 시간으로서 방학의 의미는 크다하겠습니다. 아무도 그려놓은 그림이 없기에 다양한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신나고 생산적인 방학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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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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