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로봇이 아닌데, 난 행복하고 싶은데...

도서관 '글쓰기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 (1)

등록 2004.08.01 15:32수정 2004.08.0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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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동안 시립도서관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빼고도 20일 동안을 함께 얼굴을 마주치고 지내야할 아이들은 주로 5,6학년으로 상급반 아이들답게 비교적 얌전하고 차분한 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조금 지나쳐서 아이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도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그 '어른스러운' 표정이 저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이들의 표정에서 정신적인 조숙함보다는 마치 무언가에 짓눌려 있는 듯한 강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우울'이란 단어였습니다. 한참 천진난만하고 생기발랄해야할 초등학생들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이 단어를 저는 머리 속에서 쉽게 지우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전을 들춰보기까지 했습니다.

우울(憂鬱)[명사]
[하다형 형용사]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나 분위기 따위가) 답답하고 밝지 못함.
¶우울한 표정./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a 순천 시립도서관 글쓰기 교실

순천 시립도서관 글쓰기 교실 ⓒ 안준철

사전을 덮으면서 저는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습니다. 너무나도 딱 맞아떨어지는 적확한 표현이라 마치 무슨 불행한 결과를 알아차린 듯 낙담을 하고 만 것이지요.

잔뜩 화가 나 있거나, 심통을 부리는 아이가 짓는 그런 단순한 표정과는 다른, 무슨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일그러져 있거나 그늘이 드리워진 밝지 못한 아이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제 가방 속에는 '똥'이란 제목의 글이 들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5,6학년 아이들이 쓴 글을 모은 "주먹만한 내 똥(보리출판사)'이란 책에서 고른 글입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우울한 표정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그런 우스운 제목의 글을 고른 것은 아닙니다. 글을 너무 예쁘게 쓰려는 버릇을 고쳐 주려는 생각에서 아이들에게 소개해주려고 미리부터 점찍어놓은 글이었지요.




오늘 학교 갔다 집에 오는데 배가 아프더니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같이 가는데 그런 내색을 하기가 부끄러워 꾹 참고 걸어갔다. 집에 오자마자 휴지를 들고 가방은 부엌에 내 팽개치고 쌩 하고 화장실에 달려갔다. 똥을 누는데 똥은 나올려면 순순히 나올 것이지 안 나왔다. 그래서 힘을 주었다. 안 됐다. 그래서 이제는 숨을 들이쉬고 똥구멍에 힘을 모았더니 갑자기 뭐가 번쩍하더니 되게 따가웠다. 밑은 보니 내 주먹만한 똥이 뚝 떨어졌다. 너무 아파 똥을 닦고 방에 들어갔다. 아파서 다리를 벌리고 걸었다.

글을 함께 읽고 난 뒤에 가장 마음에 들거나 인상 깊은 표현을 골라 줄을 그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몇 아이를 지목하여 밑줄 친 대목을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는 전날 우울한 낯빛을 보였던 6학년 여자아이도 끼어 있었습니다. 아이는 조금은 쑥스러운 듯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가까스로 입이 벌어졌습니다.


'아파서 다리를 벌리고 걸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실은 삽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아이도 우스운지 설핏 웃음을 내비쳤습니다. 맑은 웃음이었습니다. 조금도 어른스럽지 않은 아이다운 해맑은 웃음이었습니다. 잠시 후, 제가 아이들 앞에서 엉거주춤 다리를 벌리고 걷는 모양을 흉내내자 드디어 아이들의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웃음보가 터진 것은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잠시 후,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저는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이 글을 읽어보니까 똥이라는 말이 참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그런데 이 글이 재미있게 읽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솔직하게 썼습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한 일을 썼기 때문입니다."
"표현이 생생합니다."

"맞아요. 자기가 직접 경험한 일을 솔직하고 생생한 표현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글을 예쁘게만 쓰려고 하면 이런 구수한 똥 이야기는 안 나오지요."

이런 대화 끝에 저는 칠판에 '공부'라는 두 글자를 큼지막하게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하얀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준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딱 3분 동안 공부하면 떠오르는 생각을 솔직하게 적도록 합니다. 어떤 새로운 생각을 짜내서 쓰려고 하지 말고 지금 여러분 머리 속에, 혹은 가슴 속에 이미 들어있는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종이에 받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자신이 겪었거나, 혹은 지금도 겪고 있는 공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친한 친구에게 들려주는 식으로 솔직하게 쓰면 됩니다. 자, 시작."

a 순천 시립도서관 글쓰기 교실

순천 시립도서관 글쓰기 교실 ⓒ 안준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할 리 없는 아이들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3분 글쓰기'로 시간 제한을 둔 탓도 있었지만 그만큼 아이들은 공부에 대하여 가슴에 맺힌 것들이 많은 듯싶었습니다.

'똥'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글쓰기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 덕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날 아이들이 쓴 글 중에는 공부나 시험이 무조건 싫다거나, 부모(특히 엄마)에 대한 원망만을 원색적으로 휘갈기듯 써놓은 글도 많았습니다. 물론 그런 글에서도 "이 정도구나!" 싶은 생각에 잠시 아찔한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써놓은 글에 대한 신빙성도 감안하면서 읽었던 탓에 마음이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3분 동안 쓴 글이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잘 정리한 글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지성이 엿보이는 아이의 글에서 더 진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그 중 한 아이가 쓴 글입니다.

제목 <공부>

공부는 지금 내게 큰 문제로 다가왔다. 공부 때문에 또 엄마랑 싸웠다. 공부를 하려고 하면 왜 갑자기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요새는 스트레스도 많이 쌓인다. 학교 담임 선생님은 엄마와 나에게 너무 많이 기대를 하신다. 선생님께서도 선생님 마음대로 날 수학경시대회에 내 보내셨다. 엄마도 언제나 공부만 하라고 한다. 내게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신다.

너무 짜증나고 울고 싶다. 엄마와 휴식을 취해가며 즐겁게 이해를 해나가면서 하고 싶은데 엄마는 무조건 외우라고 하고 내가 질문을 하면 화를 내신다. 가끔씩은 집을 뛰쳐나가고 싶다. 하지만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공부를 해야할텐데 말이다. 아, 진짜 나는 내가 로봇이 된 느낌이다.

우리 가족은 무조건 공부가 아니면 짜증부터 내신다. 그러시면서 내가 조금만 짜증을 내면 이모, 아빠, 엄마가 한꺼번에 뭐라 하시는 게 이제는 공포로 내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 담임 선생님도 싫다. 내게 상의 한 마디 하시지 않고 내게 부담만 주시다니 말이다. 하루하루가 고달프고 괴롭다.

기계처럼 앉아서 외우기만 하는 공부를 나는 바라지 않는다. 물론 다 나를 위한 일이고 나도 잘못이 있다. 나도 노력중이다. 그러니 어른들도 화부터 내시지 말고 날 이해해주시면서 차근차근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다. 가끔씩 때때로 어른들이 밉기도 하고 짜증도 난다. 하지만 나도 노력할 것이다.


저는 이 글을 집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읽었습니다.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무력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아이들은 충분히 불행한데 성적표 부활 운운하며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한심스럽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내일도 저는 아이들을 만나러 도서관에 갑니다. 그들과 만나는 시간이 불과 얼마 되지 않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배우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싶습니다. 배움 속에서 이웃을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의 삶을 아이의 것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내 자녀가 누군가의 불행한 로봇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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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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