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늦은 저녁이었다. 군주는 오랏줄에 묶인 채 자신의 집무실로 끌려 들어왔다. 그는 먼저 자기의 권좌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대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그 주위로 빙 둘러 서 있었고, 그중 한 젊은이가 병사들에게 무슨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군주에게 다가들어 오랏줄을 풀어주었다. 젊은이가 이제 군주를 향해 말했다.
"보시다시피 당신의 도시와 백성, 그리고 이 성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접수되었소. 인정할 수 없겠지만 그것이 사실이오."
제후가 통역을 했다. 군주는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에인이 계속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도시의 새 주인은 바로 나요. 새 주인인 나는 옛 주인인 당신과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어 마지막 협상을 제의하는 바이요."
협상? 군주는 귀가 번쩍 띄었다. 협상이라면 아직도 희망이 남아 있다는 뜻인가?그는 퉁명스레 물었다.
"그게 뭐요?"
"내가 이곳을 칠 때 첫 번째로 지시한 것은 '살상을 금한다'는 것이었소. 이곳 성에서만은 그것이 지켜졌소. 그러니까 내말은 그대의 가족과 성 안의 식구들은 모두 무사하다는 뜻이오."
"그래서 어쩌란 말이오?"
"당신이 순순히 항복한다면, 아니 내가 새 주인임을 인정한다면 당신과 가족을 살려줄 것이오."
살려준다? 그렇다면 역습할 기회를 얻는다. 보르시파나 라라크로 가서 연합군사를 이끌고 온다면 이런 외방인쯤은 다시 물리칠 수 있다, 군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른 대답했다.
"항복하겠소. 이제 당신이 새 군주요."
"그럼 이제 내 조건을 말하겠소. 당신은 1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하오. 그냥 풀어줄 경우 당신이 반란을 도모할 수도 있어 1년간 격리를 시키겠다는 것이오."
군주는 간신히 곧추세웠던 자신의 희망나무가 다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쓰러지는 나무라도 붙잡고 봐야 한다. 군주가 되물어보았다.
"1년 뒤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그때는 자유요. 당신이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소. 물론 이곳만 제외하고 말이오."
군주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는 비로소 그 젊은이가 자기의 영광과 권력을 완전히 차압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단한 고수였다. 보통 그 나이의 머리로는 생각해볼 수 없는 어떤 고차원의 지혜가 젊은이에게 깃든 것 같았다. 에인이 거듭해서 말했다.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오. 내말을 거절하면 우린 부득이 피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말을 듣고 군주는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구걸하지 않겠소. 당신이 알아서 결정하시구려."
군주의 그 대답에 에인은 딜문 정벌 때의 수장을 떠올렸다. 같은 상황에서도 그들의 대응 방식은 너무도 달랐다. 딜문의 그 적장은 벌벌 떨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이 사람은 주어진 결과에 좀더 나은 순리만 바랄뿐이다.
그것이 개화된 도시의 군주와 야만인 수장의 차이점인지도 몰랐다. 문득 호족이 생각났다. 수천 년 전 인간개조를 거절한 그들은 아직도 도적무리로 떠돌고 있었다. 사람의 가치는 자기 개발의 역량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던 스승의 말씀, 그것은 진리였다. 에인이 조용하게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군주의 가족을 마차에 실어 딜문으로 데려가시오. 1년간 집안에 연금하되 그 대접은 깍듯이 하시오. 그 누구도 군주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쓰거나 수모를 주어서는 아니 되오. 그런 일이 발각되면 엄벌에 처할 것이오."
에인은 잠시 제후가 군주에게 통역해줄 시간을 주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금 오십 근을 줘서 보내주시오. 그 돈이면 조촐하나마 살림터는 장만할 것이오."
에인은 이제 그 가족들을 들여보내라고 지시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책임선인이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아버지를 발견한 어린 아들 둘이 먼저 달려가서 군주를 얼싸안았다. 다음 책임선인은 군주 아내의 등도 밀었다. 그의 아내는 희망과 절망이 저희들끼리 엉켜 아무 생각도 해낼 수가 없다는 얼굴로 지아비에게 다가갔다. 시종들도 각자 꾸린 짐들을 들고 그녀 뒤를 따랐다. 당분간은 그 시종들이 군주 가족을 돌볼 것이다.
군주가 아들들을 껴안고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성 앞에는 이미 큰 마차 두 대도 대기하고 있으니 그들은 곧 딜문으로 실려 갈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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