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사
최근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자행된 김선일씨 살해 사건을 둘러싸고 외교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국내외적으로 드높다. 고 김선일씨가 일했던 가나무역의 김천호 사장이 귀국하여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말한 다음의 발언은, 한국의 외교가 특히 제3세계에 있어서는 얼마나 허술하고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사관에 말하는 것이 오히려 김선일씨 구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알리지 않았다.”
해외공관에 대한 이러한 현지 교민들의 불신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곳에서 근무하는 외교관들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클 것이다. 특히 그들이 주재국의 언어마저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라면, 업무 처리 능력은 제쳐놓고서라도 외교관으로서의 그들의 기본적인 자격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외교관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격에 비단 주재국의 언어 구사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관습 등에 대한 기본 지식과 이해 역시 필수사항이다. 우리의 문화와는 너무나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거나 우리가 친숙하지 않은 문화권의 나라들인 경우에는 더 더욱 그렇다.
우리가 흔히 ‘중동’이라고 일컫는 아랍권의 이슬람국가들이 바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나라들일 터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슬람국가들에서 근무하는 한국의 외교관들 중에서 그 나라의 말은 고사하고, 그 나라 문화와 생활관습의 바탕이 되는 이슬람문명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를 한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정수일 교수가 지은 <이슬람문명>이라는 책을 펼치면서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바로 이런 의문이었다.
2.
<이슬람문명>의 저자는 ‘우리가 이슬람을 왜 알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부터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에 따르면 이슬람세계는 이제 더 이상 세계의 변방이 아니며 이슬람문명 역시 더 이상 열등문명이 아니다.
세계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3억 명이 무슬림(이슬람교도)이고 그들이 전 세계 140여개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현재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도 이슬람문명은 세계사적으로 큰 공헌을 해온 문명이기 때문이다.
즉, 이슬람문명은 유럽이 중세의 암흑기에 접어들었을 때 발흥하여 시간적으로 고대문명과 근대문명을 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중간지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특성에 힘입어 공간적으로도 문명의 동서교류에 특출한 기여를 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사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문명이 그동안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또한 올바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서구문명 중심주의’에 우리가 너무나 깊이 침윤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문명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뿌리는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슬람 경전 <꾸르안>의 한 구절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말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 말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한 이탈리아 스콜라 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한다.
그런데도 제법 이름 있는 역사학자조차도, 이슬람교는 ‘폭력의 종교’이며 이러한 ‘폭력성’이 현재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과 분쟁의 화근이 된다는 식의 연역논리를 펼치는 근거로 이 말을 인용하고 있으니, 이는 정말 무서운 오해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주창하는 용어인 ‘지하드(聖戰)’는 뭔가?”라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그 역시 이슬람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오해가 낳은 결과이다.
원래 아랍어 단어인 ‘지하드’는 동사 ‘자하다’의 동명사로서 ‘정신적 및 육체적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함’이란 뜻이며, 이것이 이슬람의 종교적 지향과 교감을 이루어 ‘신의 길에서 헌신적으로 노력ㆍ분투함’이란 종교적 함의로 승화된 것이다. 여기에서 ‘신의 길’을 ‘이슬람’ 혹은 ‘이슬람의 정도’라고 풀이할 때, 지하드는 곧 이슬람을 위해 헌신ㆍ분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하드에는 세진(世塵)에서 벗어나 자신을 순화하기 위한 개인적인 신앙 차원의 노력과 이슬람세계의 발전이나 방어 및 확대를 위한 집단적인 공헌 차원의 분투라는 두 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전자는 내면적이고 평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후자는 다분히 외향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서구인들은 후자의 전투적 성격만을 확대 과장하여 지하드는 오직 그것뿐인 양, 서구식 개념으로 ‘성전(聖戰, holy war)’이라고 편파적으로 번역해 놓음으로써 이슬람교에서 말하고 있는 지하드의 본뜻을 훼손시키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슬람교=폭력종교’라는 그릇된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문명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오해와 편견은 이슬람교와 그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문명과 그 이슬람문명권의 실상을 두루 살펴야만 비로소 불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단순한 신앙체계가 아니라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윤리 등 사회생활의 전반, 즉 문명의 여러 영역을 총망라한 인간의 생존양식이며, 종교와 세속 쌍방을 포괄하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이슬람교의 출현과 5행 6신의 교리와 교조 무함마드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슬람문명이 낳은 학문ㆍ문학ㆍ예술, 그리고 이슬람문명권의 정치ㆍ경제ㆍ생활문화ㆍ사회운동 그리고 우리나라와의 역사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신라의 처용과 고려 속요 ‘쌍화점’에 나오는 여인의 로맨스의 대상이 바로 무슬림, 즉 당시 신라와 고려에 자주 드나들고 또한 귀화해서 살기도 했던 이슬람교도들이었다는 저자의 해석이다.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는 이슬람의 많은 역사지리서에서도 신라와 고려의 이름과 그 위치가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의 이러한 해석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이슬람문명은 무슬림 터키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의 가까운 친구였으며 이웃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이슬람과 한국간의 오랜 역사적 배경이 지금 우리가 이슬람문명을 제대로 다시 보고 올바로 평가를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3.
해외에 나와서 살다 보니, 비단 외교관들만 우리나라의 얼굴이 아니라 현지에서 살고 있는 교민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민간외교사절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아직 서툰 영어로 이곳 키위(백인)들과 중국인들과 일본인들과 인도인들에게 말을 건네며 나는 늘 조심스럽다. 피부색과 출신지가 서로 다른 것처럼 그들이 믿고 있는 종교와 문화도 서로 다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이슬람문명>을 읽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비록 내가 그들의 말은 잘 모르더라도 그들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훨씬 마음이 편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 역시 그러한 나를 통해서 우리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점점 국제화되고 좁아져서, 이제 한국의 거리에서도 다양한 피부색과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을 만나는 일이 드문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중에는 분명 무슬림들도 있을 터인데, 그들과 터놓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그들의 언어를 배우기에 앞서서 먼저 이 책 <이슬람문명>을 읽어보는 것이 순서이리라.
이슬람문명
정수일 지음,
창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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