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를 지키며 본분에 충실한 사람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 28] 홍세표 전 외환은행장

등록 2004.07.23 22:48수정 2004.07.24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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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


올해도 홍세표 전 외환 은행장이 연하장을 보내 왔다. 유난히 우리말과 글을 사랑했던 그분 따님의 담임을 맡은 지가 그 새 25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옛 정을 잊지 않는 자상한 성품을 읽을 수 있었다.

따님 홍소일양은 기억에 남는 제자 중 하나다. 입학식을 마치자마자 담임선생을 찾아와 국어 공부의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찾아온 학생이었다. 그런 일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그는 독일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친 후 아버지를 따라 귀국하여 우리 학급에서 9개월 다니다가 1979년 12월 아버지가 외환은행 뉴욕지점으로 발령이 나자 부모와 같이 미국으로 떠났다.

저는 요즘 한국에 대해 미국 사람들이 무시하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그것이 저를 무척이나 슬프게 만들어요. 선생님, 한국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꼭 전해 주셔서 진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깨우쳐 주세요. 나라를 올바로 사랑하는 학생들이라면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저는 정말 우리나라가 외국인들에게 욕먹는 것을 들을 수 없어요.

홍양이 유학 중, 편지를 보내와서 반 학생들에게 낭독해 준 일이 있었다.

홍세표 전 외환은행장
홍세표 전 외환은행장박도
홍 은행장은 대학을 졸업한 후 곧장 한국은행에 공채로 입사해서 40여 년 간 전문 은행인으로 외길을 걸어왔다. 한미은행장 재임 때 <외길을 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라는 에세이집도 펴냈다.

인생의 여정을 하나의 길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가파른 산길도 있겠고, 평탄한 대로도 있으리라. 이 길을 숨차게 달음질칠 수도 있겠고, 쉬엄쉬엄 거북이걸음으로 걸을 수도 있겠다. 내 경우는 이 길이 나지막한 언덕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길을 오르면서 속도를 높인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주변 경치를 만끽하거나 곁눈질할 겨를도 없었다.


또 언덕길을 오르는 도중에 갓길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이 길을 묵묵히 걷다 보니 어느덧 이순(耳順)을 넘겼다. 이 언덕길이 아직 얼마나 남았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앞으로도 계속 이 길만을 걷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홍 은행장은 무척 겸손한 분으로 당신 나름대로 투철한 직업관을 가진 분이었다. “또 오르는 도중에 갓길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았다”고 말씀했지만, 필자가 아는 바 당신 이모부가 박정희 대통령으로 무척 총애도 받았다. 당신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관계나 정계로 들어가서 일찍이 장관이나 국회의원 금배지는 능히 달았을 분이다.


외환은행 프랑크푸르트 지점에서 부장으로 있을 때, 은행 측으로부터 이사로 승진시켜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당신은 정중히 사양했다. 당신보다 먼저 입사해서 열심히 일한 사람의 승진 기회를 차단하여 그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해서 안 되고 그 때문에 여러 동료로부터 두고두고 손가락질 받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런 재목이 못 되었어요

빨리 진급하려고 발버둥치는 삶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런 삶은 추한 삶이 될 뿐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한다면 때가 되어 진급도 하고 좋은 일도 생긴다.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빨리빨리’ 병에 걸려 있다.

당신은 조급성을 경계하면서 나름대로의 매사를 순리에 따르는 생활 철학을 정해 놓고 그것을 지키며 살았다.

만약 진급에 눈이 어두워 그 제의를 수락했다면, 빨리 은행장은 되었을지라도 지금쯤은 아마 집에서 애나 보고 있을 게다. 만일 3공화국 당시, 권력의 비호를 조금이라도 받았다면 지금까지 은행에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 권력과 무관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긴 하나, 그것을 지켰을 때 그 결과는 소중하다는 것을 예순이 넘어서야 터득했다.

홍 은행장은 이런 생활 철학으로 살았기에, 박 대통령 사후에도 당신 자리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 동안 수차례 정권이 바뀌었지만 순리에 따라 말단 은행원에서 마침내 은행장으로 승진했다. 박 대통령 재임 때보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 때 빛을 본 셈이다.

특히 외환은행장 재임 때는 한국 금융기관 부채조정단장으로, 구미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원활히 외자를 유치해서 외환위기(아이엠에프 ) 국난을 넘기게 한 숨은 공로자였다. 외환 위기가 진정되자 후배를 위해 은행장에서 물러난 후 지금도 대기업 사외 이사로, 대학 강단에서 경륜을 펼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무슨 게이트다 무슨 로비 사건이다 하는 권력형 비리 사건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살아왔다. 역대 정권의 이런 부패 게이트 진원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가 대통령 혈육이나 친인척, 동향인이 연루되곤 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힘없는 백성들은 아직도 우리나라가 왕조시대인가를 착각케 한다. 얼마 전, 논두렁에서 만난 한 농사꾼의 말이다.

울타리로나 땔감으로 쓸 나무를 들보나 서까래로 쓰면 집이 기울어지거나 무너집니다. 내가 보기에는 면장감도 안 될 사람을, 당신 아들이라고 동생이라고 무슨 회장이네, 의원이네 시키면 나라가 온전하겠습니까?

무지렁이 백성일지라도 부정부패 비리의 근원지만은 다 안다는 투였다.

어느 날, 필자는 홍 행장에게 “왜 관계나 정계로 가지 않았습니까?”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홍 행장은 “저는 그런 재목이 못 되었어요”라고 딱 잘라 대답했다.

여러분, 전 이 순간이 너무나 슬퍼요. 어떤 친구는 제가 다시 미국으로 간다니까 부럽다고 했지만, 전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그동안 여러분과 정 들었고 내 나라 공부도 어렴풋이 익혀 가는데 또 떠나게 되어 정말 슬퍼요.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는 이를 악물고 공부할게요.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하세요.

이따금 이들 부녀가 떠오르면, 따님이 학교를 떠나던 날 학급 친구들에게 울먹이며 하던 이 인사말과 “저는 그런 재목이 못 되었어요”라고 말씀하던 아버지의 말이 생각난다.

제 분수를 지키며 사는 사람과 본분에 충실한 사람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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