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생가 여유당에서 황영구 치과원장박도
하지만 세상을 자세히 살피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남몰래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거나,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선행을 베푼 이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이 사회가 지탱되고,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필자는 지난해 말 '의를 좇는 사람'이라는 주제의 글을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던 중, 한 우국지사가 “평생소원이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립문서기록보관청을 찾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기사화한 적이 있다.
그러자 많은 네티즌들이 모금을 제의해서 시작한 바, 그 열기는 애초의 예상을 뛰어넘어 불과 12일 만에 목표액 3000만원을 초과 달성했다. 성금을 보내신 1000여 분중에는 익명도 많았다.
익명 기탁자 중에는 ‘힘내십시오’ ‘민족정기회복’ ‘건투하세요’ ‘소원성취’ ‘진실은 반드시’ ‘존경’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승자’ ‘대한민국 만세!’ ‘파이팅’ ‘성공하세요’ ‘한국인의 혼’ ‘작은 소망으로’ ‘진실과 화해’ ‘잘 다녀오세?’ ‘민족정기 부활’ 등 많은 격려의 글을 이름대신 새겨 보내셨다.
또, '촌부'라는 이름으로 "망설이다가 하루 일당을 보냅니다"라는 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모금운동을 벌인 게 미안했다.
미국으로 출국 전날 한 통의 전화를 받은 바, 익명으로 성금을 보낸다면서 잘 다녀오라는 간곡한 인사말도 잊지 않았다. 마침 그 전화번호가 내 손전화에 남아 있어 귀국 후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성금기탁자 일천여 명을 대표해서 한 번 만나 뵙기를 청했다. 그러나 번번이 다른 분을 만나라고 거절하다가 필자의 끈질긴 청에 교외에 바람 쐬는 조건으로 동행케 되었다.
그는 뜻밖에도 나이 지긋한 치과의사 황영구(53) 박사였다. 그가 안내한 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팔당호 언저리에 있는 다산 선생 유적지였다. 필자도 늘 한 번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전남 강진의 귀양지에서 두 아들 학연, 학유에게 여러 편의 글을 주었는데, 폐족 집안 자식으로서의 처신과 아울러 사람으로서 도덕적인 품위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길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중에서 “재물은 메기와 같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의 옷이나 음식, 재물 등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고 쓸데없는 것이다. 옷이란 입으면 닳게 마련이고 음식은 먹으면 썩고 만다. 또 재물은 자손에게 전해 준다 해도 끝내는 탕진되거나 흩어지고 만다. 다만 가난한 친척이나 벗에게 재물을 나누어준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 황 박사도 이 글이 좋아서 다산 선생에게 매료된 것이 아닐까? 내 나름대로 추측하면서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팔당호 강 언저리 나무 그늘에 앉아서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