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만든 특별한 생일 선물

(오클랜드 하늘에 뜨는 무지개 21) 비싼 것보다는 마음과 정성이 담겨야

등록 2004.07.26 14:20수정 2004.07.2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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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9시가 넘도록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딸아이 동윤이가 일요일인 어제,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부스럭거립니다. 그 소리에 깨어나 시계를 보니 8시가 조금 넘어 있습니다. 주말마다 늦잠을 즐기는 내게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잠이 깬 김에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침대를 빠져나왔지요.


전날 늦게 잠이 든 아내는 아직도 곤하게 자고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옷을 꿰차고 살그머니 방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있자니 동윤이 방에서 피리 소리가 들리더군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였습니다.

아침부터 웬 피리를 불고 야단이람. 아내의 잠을 깨울까봐 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윤이에게 그만 두라고 말하려다가, 짐작 가는 데가 있어 오히려 내가 그만두었지요. 녹음을 하려고 저러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다 다를까, 동윤이는 그 곡을 몇 번이나 연습하더군요. 녹음을 하려면 틀리면 안 되니까요. 동윤이는 내일로 다가온 가장 친한 친구 테라이의 생일 선물로 줄 녹음테이프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중이었던 겁니다.

동윤이는 한 달 전부터 테라이의 생일 선물로 뭘 줄까 고민하는 눈치였습니다.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 바로 자신이 손수 녹음한 테이프를 선물로 주자는 거였지요. 몇 푼 돈을 주고 문구나 액세서리를 사서 선물로 줄 수도 있겠지만 동윤이는 좀 더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우리 집에 녹음 장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스테레오 세트가 있기는 하지만 녹음용 마이크가 없어서 녹음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저께 토요일 저녁에 아는 교민에게 부탁해서 오늘 오후까지 쓰기로 하고 녹음기를 빌려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동윤이의 녹음 작업은 토요일 저녁 시간으로는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동윤이는 1시간짜리 공 테이프의 앞뒷면을 다 채울 요량이었고, 자신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까지도 담고 싶어 했으니, 일요일 아침이라고 늦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겁니다.

한참을 연습한 동윤이는 마침내 피리로 연주한 <환희의 송가>를 녹음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한참 동안 저 혼자 수다를 떠는 소리가 들립니다.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리기도 하고 때론 웃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a 지난 여름 우리 집에서 팔짱 끼고 노래하는 테라이와 동윤이

지난 여름 우리 집에서 팔짱 끼고 노래하는 테라이와 동윤이 ⓒ 정철용

늦은 아침 식탁에 앉은 동윤이에게 “뭘 그렇게 열심히 떠들어 대면서 녹음을 했니?”라고 물어보았더니, “일급비밀”이라며 말을 안 합니다. 분명 비밀 축에도 끼지 못할 이야기들이겠지만 나는 딸아이의 비밀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더 캐묻지는 않았습니다. 한창 꿈 많은 나이이니, 이러쿵저러쿵 친구에게 늘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좀 많겠어요.

그런데 동윤이는 아침을 먹고 나서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도 한 마디 하라며 녹음 버튼을 누릅니다. 엉겁결에 나는 “해피 버쓰 데이, 테라이” 라고 말해주고, 한국말로도 “생일 축하해” 라고 말해 주었지요.

우리 집에 자주 전화를 걸어오는 테라이는 가끔씩은 분명한 한국말로 “제니(딸아이의 영어 이름) 좀 바꿔주세요” 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 말은 테라이가 한국인 친구들 사이에서 배운 몇 안 되는 한국말 중의 하나이지요. 내 목소리가 담겨 있는 이 테이프를 듣게 되면 이제 생일 축하의 말도 한국말로 배우게 되겠군요.

그런가 하면 동윤이는 피아노 연주 소리도 녹음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연주한 곡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부탁해서 몇 곡을 녹음하더군요. 그렇게 한 녹음 작업은 어제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모두 끝났습니다.

녹음을 다 마친 동윤이는 몹시 뿌듯한 모양입니다. 값으로 치자면 얼마 나가지 않겠지만 마음과 정성을 담았으니 이 얼마나 멋진 선물입니까! 동윤이의 그 마음과 정성이 테라이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리라 생각하니 내 마음도 흐뭇했습니다. 테라이가 이 테이프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훗날 다시 듣게 된다면 그 얼마나 멋진 추억이 될까요!

이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돈으로 때우는 선물보다는 작은 것이라도 마음과 정성이 담긴 선물이 받는 사람을 더 감동시키고 기억에도 더 오래 남게 되는 법이지요.

딸아이가 친한 친구에게 주려고 만든 이 작은 생일 선물 앞에서 그동안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었던 값비싼 선물들이 문득 초라해집니다. 아이들은 정녕 어른들의 아버지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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