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빨리 파리 좀 잡아 주세요!”

방학을 하자 애들이 떼로 몰려와 놀다 갑니다

등록 2004.07.31 13:00수정 2004.07.3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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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구원, 진규, 승환, 은빈, 유라. 더워 죽겠는데 왜 자꾸 사진 찍으라고 그래요?

구원, 진규, 승환, 은빈, 유라. 더워 죽겠는데 왜 자꾸 사진 찍으라고 그래요? ⓒ 박철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아침 6시부터 달리기를 합니다. 그동안 꾀를 부리고 쉬다가 다시 시작한 지 2주가 되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출발해서 무학리까지 경지 정리가 된 논길을 달립니다. 달리다 힘이 들거나 숨이 차면 걷기도 합니다. 너른 들판이 초록빛으로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집에 도착하면 7시 20분쯤 됩니다.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하기 전에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데 은빈이가 다가와 불쑥 한마디를 던집니다.

"아빠, 힘들겠다! 가만 있어도 더운데 왜 달리기를 해요?"
"응, 아빠가 건강해서 오래 살아야 네가 시집 가는 것도 보고, 손자들 재롱 부리는 것도 보고 그러지. 아빠는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운동하는 거야."
"에이. 거짓말, 아빠 살 빼려고 그러지요? 사람들한테 근사하게 보이려고 운동하는 거 다 알아요."

샤워를 마치고 아침밥 대신 찬 녹차와 토마토를 먹고 있는데 누가 은빈이를 부릅니다.

"은빈아! 노~올자!" 승환이 녀석입니다. 아침 8시가 채 안되었는데 동네 조무래기들이 떼로 몰려왔습니다. 은빈이는 팬티만 입고 있다가 기겁을 하더니 잽싸게 옷을 입고 나갑니다. 여름 방학을 하고 나서 동네 아이들이 심심하니까 매일 떼로 몰려와 교회 마당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갑니다.

a 은빈이외 추유라. 둘이 제일 친하다.

은빈이외 추유라. 둘이 제일 친하다. ⓒ 박철

거실 창문으로 내다 보면 작은 막대기로 땅을 파서 거기다 물을 붓고 두더지잡기 놀이도 하고, 여자애들은 사금파리로 소꿉장난을 하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를 번갈아 가면서 하는데 하는 짓이 어른을 뺨칠 정도로 살살 녹습니다.


잠시 후에 은빈이가 쿵당거리면서 내 서재로 들어오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아빠! 빨리 파리 좀 잡아 주세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파리를 어디다 쓰려고?"
"방금 구원 오빠가 개구리를 잡았는데요. 배가 고픈가 봐요. 먹이로 주려고요."

낮잠을 잘 때마다 성가시게 굴던 파리가 단체로 이사를 갔는지 파리채를 들고 잡으려고 했더니 한 마리도 보이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간신히 파리 한 마리를 잡아 주었더니 은빈이가 그걸 받아 들고 좋아서 뛰어 나갑니다.


나는 서재에서 주일 설교를 다듬고 사진을 정리하다가 아이들이 지금 무얼 하고 노는가 궁금해서 창밖을 살폈더니 한 녀석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이렇게 더운데, 이 녀석들이 모두 어딜 갔을까?' 애들이 행방을 아내에게 물었더니 모두 교육관에서 논다고 합니다.

내가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가서 교육관 문을 열었더니 아이들이 깜짝 놀랍니다. 사내 녀석들은 방석으로 터널을 만들어 놓고 터널놀이를 하고 있고, 은빈이와 유라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유라는 도회지에 예쁜 사과나무를 그렸고, 은빈이는 눈이 오는 겨울 풍경을 그렸습니다. 내가 까닭을 물으니 유라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a 유라가 그린 그림. 사과나무. 그네도 달려 있고 보기만 해도 시원하지요?

유라가 그린 그림. 사과나무. 그네도 달려 있고 보기만 해도 시원하지요? ⓒ 박철

"날씨가 하도 더워서 사과나무를 그렸어요. 사과를 먹으면서 나무 그늘에서 쉬고 싶었어요."
은빈이도 유라 언니에게 질 새라 대답합니다.
"저도요. 날씨가 더워서 눈 오는 겨울을 그리고 있는 거예요."

사내 녀석들은 그림 그리기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많이 어질러 놓을까 시합이라도 하듯이 교육관 바닥을 방석으로 엉망진창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내일(31일) 아침 KBS-2TV에 '생방송 세상의 아침'에 방송하기로 되어 있는 승환이가 여전히 콧물을 흘리면서 살갑게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목사님! 저요, 내일 아침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 알고 계셨어요?"
"그럼. 알고 있지. 승환아!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냐?"
"예. 기분 째지지요."

유라도 자기 동생이 TV에 나온다고 하니 자랑스러운가 봅니다. 두 남매는 지난 IMF로 인해 엄마 아빠와 함께 지내지 못하고, 시골 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a 개구장이 삼총사. 바보 표정.

개구장이 삼총사. 바보 표정. ⓒ 박철

"유라야! 방학해서 좋으냐? 요즘 집에서 뭐하고 지내니?"
"방학 하니까 실컷 놀아서 좋아요. 할아버지 담배 심부름도 하고, 할머니가 떡 갖다 드려라 닭죽 갖다 드려라 심부름 시키면 잘해요. 그리고요. 낼 모레 아빠가 데리러 온댔어요. 에버랜드에 가서 놀이기구도 타고 놀 거예요."
"우리 유라, 참 착하고 예쁘구나!"

우리집에 단골로 놀러오는 애들은 서구원, 추승환, 추유라, 이진규입니다. 주로 바깥에서 놀아 얼굴이 새카맣게 탔습니다. 하도 짓궂게 놀고 어질러 놓아서 내가 가끔 야단을 쳐도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숫기도 좋고 말도 잘 합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와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매미소리와 짬뽕이 되어 무더운 여름을 덜 심심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밖이 조용한 걸 보니 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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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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