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을 비롯한 안동 유림 가족들이 살았다고 추정된 집들을 후손들이 살피고 있다박도
이회영, 이상룡의 주선으로 망명지에서 입적과 토지 매매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자 이곳에서 떨어진 합니하에다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여 1912년 7월에 낙성식을 가졌다. 신흥무관학교, 신흥중학교가 명실상부 탄생케 된 것이다. 천연 요새에 훌륭한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데에는 이회영 형제들이 거금을 쾌척한 결과였다. 여기에 이동녕, 이상룡, 김대락 등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신흥강습소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까지 본교, 분교를 합하여 약 3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들은 청산리 전투의 주역으로, 의혈단의 단원으로, 독립전사를 기르는 여러 학교의 교사가 되는 등 대부분 항일독립 전선에 중추 인물이 되었다.
이국성씨는 추가가마을을 떠나면서 신흥무관학교가 1920년에 폐교된 게 아니고, 그 명맥이 1930년 초까지 이어졌다면서 굳이 그곳으로 차머리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