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빈아! 너 옷 좀 입고 외워라!”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의 사랑이야기(18)

등록 2004.08.07 12:58수정 2004.08.07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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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집 은빈이(초등학교 2년)가 구구단에 붙들려 그걸 외우지 못해 징징거리고 있습니다. 여름 방학 내내 노느라 단 하루도 일기를 쓴 적이 없고, 숙제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그림 그리기 외에는 공부하고는 완전 담을 쌓고 지냅니다. 그렇게 실컷 놀고 먹고 자고를 되풀이 하다가 엄마의 혹독한 그물망에 걸려 들었습니다. 아내가 은빈이에게 엄명을 내렸습니다.


"너 내일까지 구구단을 완전히 못 외우면 여름 휴가 못 갈 줄 알아! 장난 아니야!"

a "잉, 아빠! 흙 장난 하는 걸 찍으면 어떡해용!"

"잉, 아빠! 흙 장난 하는 걸 찍으면 어떡해용!" ⓒ 박철

그런 아내의 명령이 있고 부터 은빈이는 집안에 갇혀 구구단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만날 밖에서 놀다가 집안에 갇혀 구구단을 외우려고 하니 갑갑증에 견딜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팬티만 입고 소파에 발랑 누워 마지못해 구구단을 외웁니다.

"칠일은 칠, 칠이 십사, 칠삼 이십일, 칠사 이십팔, 칠오 칠오 칠오삼십…"
"야! 어째 칠오 삼십이냐? 그럼 오칠은 얼마냐?"
"오칠은 삼십오."
"그래. 그럼 칠오 삼십오지. 어째 칠오 삼십이냐?"
"엄마, 더운데 아이스크림 먹고 하면 안돼요?"
"안돼! 똑바로 앉아서 정신 차리고 해!"

오늘 아내의 외출로 이른 점심을 먹으면서 네 식구가 밥상에 둘러앉았습니다. 은빈이는 입이 잔뜩 나와서 중환자가 밥을 먹는 모양으로 마지못해 밥을 입에 넣습니다.

"은빈아! 너 엄마가 구구단 외우라고 했다고 화 났냐? 아빠 옛날 이야기 좀 해 줄까? 아빠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산수 시간이었거든. 선생님이 '애들아! 우리 반에 누가 구구단 외우는 애 있니?'하고 물으시잖아. 그래서 아빠가 용감하게 손을 번쩍 들었지. 그랬더니 선생님이 내가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면서 손을 든 줄 알고 앞으로 나오라고 그러시잖아. 그래서 나갔지. 학교 다니면서 처음으로 불려 나간 거야. 그러니 얼마나 떨렸겠어.


그리곤 선생님이 구구단을 한번 외워 보래. 그래서 내가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이삼은 육…'하고 구단까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단숨에 외워 버린 거야. 그랬더니 선생님도 깜짝 놀라고 우리반 애들도 다 놀랐어. 왜냐하면 아빠는 그때 20리길을 통학하는 촌놈이었거든. 만날 콧물이나 질질 흘리고 말도 못하던 놈이 구구단을 단숨에 외웠으니 놀랄 수밖에.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야. '야, 너 공부 잘 하는구나?'하시면서 상으로 책받침이랑 공책 두 권을 주시는 거야. 그걸 받고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a 은빈의 흙 장난. 흙 장난이 제일 재밌다고 한다.

은빈의 흙 장난. 흙 장난이 제일 재밌다고 한다. ⓒ 박철

은빈아! 아빠가 어떻게 해서 구구단을 쉽게 외웠는지 아냐? 아빠 누나, 네 고모가 외우는 걸 어깨 너머로 따라 했을 뿐이야. 따라하지 말라고 해서 속으로 따라 했어. 그랬더니 저절로 되더라고. 하기 싫어도 자꾸 외우면 자동으로 외워지게 되어 있어!"


"아빠! 그 얘긴 아빠한테 10번, 아니 백번쯤 들었을 거예요. 아빠는 머리가 좋아서 구구단을 잘 외웠는지 몰라도 저는 머리가 나빠서 잘 외우지 못해요."

"은빈아! 그런데 너는 요즘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는 어찌 그리 쉽게 외웠냐? 아빠는 배우고 싶어도 가사를 외우지 못해서 못 배우겠던데."
"텔레비전에서 오빠 언니 가수들이 노래 부르는 거 몇 번 따라 하면 저절로 외워져요."

"그런데 참 이상하다.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는 쉽게 외우면서 너는 어찌 구구단을 못 외워서 절절 매는 것이냐?"
"아빠는 어떻게 구구단 외우는 거와 노래 배우는 게 같아요?"

점심밥을 다 먹고 나서 은빈이의 구구단 외우기가 또 시작되었는데 좀이 쑤시는 모양입니다. 팬티만 입고 벌렁 누워서 몸을 비틀어 댑니다. 세상의 모든 고민을 자기 혼자 다 겪는 표정으로. "칠일은 칠, 칠이 십사, 칠삼 이십일, 칠사 이십팔…" 완전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처량하게 구구단을 외웁니다.

"은빈아! 너 옷 좀 입고 외워라. 어찌 다 큰 아가씨가 팬티만 입고 있냐? 어서 윗도리라도 좀 걸쳐라."
"아빠! 자꾸 말 시키지 마세요. 지금 구구단 외우느라고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오늘 우리집에 누가 오세요? 더워 죽겠는데 왜 자꾸 옷을 입으라고 그래요?"

은빈이와 아내의 구구단 외우기 줄다리기는 한치의 양보가 없습니다. 아내는 은빈이가 툴툴거려도 입을 꾹 다물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너 오늘 중까지 구구단 확실하게 외워야 모레 휴가 데리고 갈 거야. 엄마 말 명심해!"
"엄마는 왜 나만 공부시키고 왜 작은 오빠한테는 공부하라는 말을 안 해요."
"야! 너 지금 엄마를 위해서 구구단 외우는 거니? 엄마가 갔다 와서 얼마나 잘 외웠는지 확실하게 검사할 것이니 잘 알아서 해!"

a 동네 애들이 타고 온 자전거.

동네 애들이 타고 온 자전거. ⓒ 박철

아내가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자 은빈이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모양입니다. 한결 기분이 좋아진 표정입니다. 살그머니 내 방으로 들어와서는 애교가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아빠! 나가 놀아도 되지요?"

내가 자기편인 줄 아는 모양입니다. 내 대답이 채 끝나기도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입에 물고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밖에서 은빈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마 애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저녁, 은빈이가 지 엄마에게 숙제 검사를 어떻게 받을지 모르지만 구구단 외우느라 징징거리는 것보다 밖에서 헤헤거리며 웃고 노는 게 훨씬 보기는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이 조금 걱정되네요. 아내가 조금 무섭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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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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