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시린 아름다움, 더 사무치는 학살의 한

[내가 만난 제주 ①] '잠들지 않는 함성' 4·3을 따라가다

등록 2004.08.09 01:50수정 2004.08.0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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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맨 왼쪽에 보이는 것이, 4·3항쟁의 횃불이 가장 먼저 타올랐던 샛별오름이다.

맨 왼쪽에 보이는 것이, 4·3항쟁의 횃불이 가장 먼저 타올랐던 샛별오름이다. ⓒ 김은주

누군가 그랬다. 이 땅에 제주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밋밋했겠느냐고. 일주일 동안 제주에 머물면서,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끝없는 오름들, 쉴새없이 불어대는 바람, 바다에 몸을 숨기는 해녀들 그리고 곳곳에 남아 있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

여기에서 저기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무친다'는 형용사를 끝없이 떠올렸다. 아름다운 섬이 분명한데, 그저 이쁘고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사무침이 이 섬에 있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신혼 여행지는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핀 노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있다



4·3의 이야기를 시로 썼다 해서 감옥까지 다녀 온 시인 이산하는 제주도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정말로 그랬다. 제주에는 가는 곳 어디에나, 학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1948년 4월 3일부터 제주 사람의 10%(추정 3만, 미군 정보 보고서에는 1만5천 명 발표)가 토벌대에 의해 죽었으니 어느 마을이고 편안한 4월을 보낸 곳이 없었다.

a 북촌초등학교 운동장 모습. 이 곳에서 죽음이 결정된 사람들은 옴팡밭에서 처형당했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 모습. 이 곳에서 죽음이 결정된 사람들은 옴팡밭에서 처형당했다. ⓒ 김은주

제주 북촌 마을 옴팡밭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 1978년 현기영이 <순이 삼촌>에서 이야기했던 바로 그 '옴팡밭'이다. 소설에서 순이 삼촌은 아이 둘을 잃은 그 날의 충격에서 종내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남자란 남자는 다 학살당해 '무남촌'이라 했다는 그 마을에서 겪은 공포가, 그이를 살고 싶지 않게 했던 것이었다고 현기영은 이야기했다. 바로 그 북촌초등학교에 나는 섰다. 그 날,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갈라 세웠다던 운동장에는 그리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참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선택하라는 군인들 앞에서 사람들은 헷갈렸겠지. 어느 편에 서야 진짜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인지 열심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겠지. 애초에 이념을 가지고 저항한 이들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힘겹게 살아왔을 뿐인 사람들이기에,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디든 선택하라는 명령에 다만 얼떨떨할 뿐이었겠지.

그렇게 수백 명의 목숨은 까닭도 모른 채 쓰러져 갔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살 장소인 옴팡밭까지, 채 10분도 안 걸리는 길을 걸었다. 생의 마지막 10분, 그 길이 그네들에겐 얼마나 길고 아득한 길이었을까?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 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순이 삼촌>에 적힌 대로, 그 날 죽은 사람이나 죽지 못한 사람이나 한꺼번에 죽은 목숨이었기는 매한가지였을 터. 빗돌도 없이, 온통 풀에 뒤덮여 누워 있는 그네들의 무덤 앞에서 잠시 침묵하고, 묵념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옴팡밭 한켠에 고인 물을 가득 덮으며 피어난 연꽃 몇 송이가 처연하게도 아름다웠다.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사람들이 숨어 지냈던 북제주군 대섭이굴에 잠깐 들렀다. 밖에서 보면 입구가 자그마한데다 나무 뿌리와 풀이파리들이 엉켜있어 알고 보지 않으면 그냥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가파른 입구를 내려가니 제법 평평한 땅이 나온다.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연기 한 점 새 나갈까, 한 자락 소리라도 새 나갈까 조마조마하면서 지냈겠지. 언제쯤 두렵게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되는 고운 시절이 올까, 분노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볼 수 있는 꽃 같은 세월이 와 줄까 고대하면서.

불도 없는 깜깜한 동굴 안에서,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 목숨들이 느꼈을 공포에 조금이라도 가 닿아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어림없는 생각이었겠지만….

정방폭포에서도 그랬다. 바다로 바로 떨어져 내리는 높이 23미터의 장쾌한 폭포 줄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했다. 휴가철이라 육지 사람들이 많이도 몰려와 있었다. 하지만, 그 곳이 4·3항쟁 때 남제주군에서 가장 큰 학살터였다는 것을 알리는 어떤 안내도 없었다. 먼 시절, 추사가 발견했다는 바위 탁본에 대한 설명글은 매표소에서부터 또렷하게 붙어 있었지만 말이다.


a 시원하게 떨어져 내리는 정방폭포. 길이가 23미터다. 학살의 장소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시원함.

시원하게 떨어져 내리는 정방폭포. 길이가 23미터다. 학살의 장소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시원함. ⓒ 김은주

토벌대가 제주 사람들을 묶어 놓고 살인 훈련을 했던 곳이란다, 여기가. 총알을 아끼겠다고 사람들을 주르르 세워 놓고, 맨 앞 사람에게만 총을 쏘고는 한꺼번에 폭포 아래 떨어뜨려 익사시켰다는 곳이다. 야속한 시절이었다. 인간의 존엄이란 것이 대체 어느 순간까지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인지, 곱씹어 보게 만드는 암울한 시간들….

폭포 앞에는 구슬처럼 맑게, 환하게 웃으면서 물보라를 맞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에게 4·3의 이야기 따위는 지나간 세월의 교훈 정도로만 품고 살아도 되게, 간악하게 저지른 살인 훈련 따위는 영영 모르고 살아도 괜찮다 싶게, 그 정도로 괜찮은 나라에서 살 수 있으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a 정방폭포에서 물보라를 즐기는 사람들.

정방폭포에서 물보라를 즐기는 사람들. ⓒ 김은주

정방폭포에서 멀지 않은 남제주군 대정읍으로 백할아버지 한무덤을 찾아가는 길은 조용하고도 아름다웠다. 보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제주의 땅은 포슬포슬 말라가고 있었지만, 한낮의 햇볕에 뜨겁게 달구어진 황토는 건강해 보였다. 맨발로 밭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마음으로부터 내치지 않는 넉넉함이 들판에 가득했다.

그 넉넉한 들판 한가운데 132명의 시신을 모신 무덤자리가 있었다. 멀리 송악산이 우뚝히 솟아 바다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고, 땅콩 이파리들이 바람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고 있는 그 들녘에 1950년 새벽 2시에 한꺼번에 처형당한 님들이 누워 있다.

a 백할아버지 한무덤. 모두 132기의 시신이 섞여 묻힌 곳이다.

백할아버지 한무덤. 모두 132기의 시신이 섞여 묻힌 곳이다. ⓒ 김은주

아이고 어른이고, 남자고 여자고, 늙었거나 젊었거나 상관 없이 닥치는 대로 죽여서는 시신조차 양도하지 않아 6년 8개월이 지난 뒤에야 겨우 뼈를 수습할 수 있었다 한다.

누구의 머리인지, 누구의 다리뼈인지, 이것이 내 아이의 팔인지, 저것이 내 고모의 엉치뼈인지,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한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은 그저 비슷한 크기의 머리에 비슷해 보이는 척추를 두고, 대충 팔다리 얼개만 맞춰서 132구의 시신을 만들었다고….

얼마나 기막힌 일이었겠는가. 사람들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는 모두 한 조상을 모시는 한 자손들'이라며 ‘백조일손지묘’라 하고, 제사도 함께 지내고 있다.

"언제, 어떤 분들이 다녀갔는지 적어 주세요.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합니다."

무덤 입구에 일부러 편지함까지 만들어 두었길래 차마 그냥 오지 못하고, 몇 마디 적어 넣었다. 관광지에만 머무르는 발길이 아니라 님들의 아픔을 이해해 보고자 애쓰는 사람들 여기 왔었다고, 아무도 다녀가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그러니까 외로워 마시라고,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는 말씀, 참 고맙다고…. 잠깐 묵념하는 동안, 들녘에 불어오는 바람에 또 한 번 사무치더라.

a 무덤에 묻힌 뒤에도 그네들의 평화로운 안식은 군부 정권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무덤에 묻힌 뒤에도 그네들의 평화로운 안식은 군부 정권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 김은주


a 멀리 산방산이 보인다. 머리와 다리와 팔, 죽기 전에는 따로였으나 죽음 뒤에 하나의 조상, 하나의 후손으로 묶였다.

멀리 산방산이 보인다. 머리와 다리와 팔, 죽기 전에는 따로였으나 죽음 뒤에 하나의 조상, 하나의 후손으로 묶였다. ⓒ 김은주

이번에 가 본 곳 가운데 가장 마음이 아팠던 곳은 아무래도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이 아닐까 싶다.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156명이 한꺼번에 죽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4·3을 지나고 사람들이 더 이상은 이 마을에 들어와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얼마나 무섭고 몸서리쳐지는 세월이었으면 그리 했겠나 싶어, 무등이왓 마을을 돌아돌아 걸으면서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여름 풀도 무성하고, 농사짓는 이들이 뿌려 놓은 오이며, 호박이며, 땅콩들은 제각각 건강하게들 자라고 있었으나 그 곳에 머물러야 할 사람들의 소리가 없으니, 적막한 풍성함일 수밖에 없었다.

a 무등이왓 마을. 대나무만이 그 곳이 집터였음을 말해 준다. 원래는 마당이었던 곳이 밭으로 변했다.

무등이왓 마을. 대나무만이 그 곳이 집터였음을 말해 준다. 원래는 마당이었던 곳이 밭으로 변했다. ⓒ 김은주

집은 몽땅 불타 없어져 버렸지만, 집을 감쌌던 돌 울타리도, 뒤꼍을 지키던 대숲도 고스란히 남아 이 곳이 무등이왓이라고,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동광리 도로 옆에서 7기의 헛묘들을 만났다. 큰넓궤에 숨어 살다가 정방폭포에서 처형 당한 이들 가운데, 시신을 찾지 못한 7분을 모신 무덤이란다.

시신이 없다 해서 '헛묘'라 한다는데, 찾지 못한 아비의 빈 무덤을 찾아와 울음 삼킬 이들을 생각하니 울분이 솟았다. 하늘은 쨍하니 맑고, 햇살도 미치도록 날카롭게 환하건만, 가는 곳마다 멀쩡하게 행복했다더라, 하는 곳이 하나도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성산 일출봉은 또 어떠한가. 일출봉과 섬을 잇는 '터진목'에서는 고성리와 오조리 마을 백여 명이 죽어 나갔다 한다. 관음사 들어가는 길에는 토벌대와 사람들이 돌성을 쌓고 싸우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름다운 곳을, 그저 아름답게만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 또한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짐이겠지.

a 청년들이 ‘멸치 널어지듯’ 죽어 나갔다는 성산 일출봉.

청년들이 ‘멸치 널어지듯’ 죽어 나갔다는 성산 일출봉. ⓒ 김은주

제주도에서 탁발 순례를 마치던 날, 도법 스님은 그러셨다.

"우리가 돌았던 곳곳에 죽임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골목골목들이 삶의 평화가 짓밟히고 파괴되는 아픔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마음 모아 걸음마다 삶의 문화의 씨를 뿌리자, 지금 이 순간 이후 어떤 명분으로도 생명을 죽이거나 평화를 파괴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자, 염원을 남기고 걸었다."

나 역시 그랬다. 내가 걷는 걸음마다, 학살의 현장에 이를 때마다 잠시라도 두 눈 감고 간절하게 빌었으니, 사무치게 아름다운 섬 제주에 나의 소원도 한 자락 남겨 두고 왔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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