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지코지. 풀밭도 하늘도, 더없이 푸르다.김은주
성산 가까이에 붉은 화산재(그걸 ‘송이’라고 한다더군요)로 덮인 섭지코지가 있습니다. 바다를 향해 곧장 내달리고 있는 이 섭지코지는 드라마 ‘올인’ 때문에 망가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어도 좋을 것을, 바다로 나 있는 산책길에 온통 송혜교와 이병헌의 사진을 세워 놓았는가 하면 드라마 세트장이 태풍에 날아갔다고, 한쪽에서는 그 세트장 복원하느라 시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눈에 거슬리고 귀에 거슬리는 것들에 눈 닫고, 귀 막고 나면 너른 풀밭과 맑고 환한 하늘, 그리고 그 하늘 빛깔을 그대로 닮은 바다만 남습니다.
“야, 진짜 미치게 파랗네.”
그 바다, 그 하늘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 아름다워서 미쳐 버릴 것 같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새똥이 하얗게 엉긴 선녀바위에는 갈매기들이 심심한 얼굴로 가끔 울어 대고, 겟메꽃이며 술패랭이며 돌매화가 잔뜩 어우러져 있는 거기 풀밭에서 오래도록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양 해수욕장까지 걸어 내려오면서 본 바다는 또 얼마나 고운 옥빛이던지요.
몇 년 전에 갔던 아부오름도 좋았는데, 영화 <이재수의 난>을 찍은 곳이지요. 움푹 패인 분화구 안에는 말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불어오고, 온갖 들꽃이 피어나 나무 한 그루 없는 아부오름의 부드러운 능선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고, 분화구 바닥까지 달려 내려가는 동안 사람 손길 타지 않은 야생풀들이 거칠게 발을 잡아 채는 곳이었어요.
너무 좋은 곳에 가면 “한숨 자고 가야 하지 않나?” 소리를 빼놓지 못하는 나는 그 곳에서도 다리 뻗고 한참을 누워 있었더랬지요. 이번 걸음에는 다시 들러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꼭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입니다.
아, 곶자왈 얘기도 빼놓으면 안 되지요. 오름 근처라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곶자왈은 제주 사람들의 지하수 저장 창고인데요, 나무와 풀이 뒤엉켜 자라고 있는 곳입니다. 규모가 큰 곳으로는 교래 곶자왈이 있는데, 하늘을 가릴 만큼 키가 큰 나무들이 서 있는 길을 따라 지나가노라면 세상에 나무랑 하늘이랑 바람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곳입니다.
쓸모도 없는 땅 곶자왈을 밀어 버리고 거기다 리조트를 만들겠다고 해서, 한동안 시끄러웠다는데 경기가 나빠지면서 그 소리가 쑥 들어갔다네요. 맑은 물을 포기하고, 눈 앞의 돈다발을 선택하는 순간, 육지 사람들은 ‘제주 삼다수’라는 말을 사전에서만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꿈속까지 찾아오는 싱싱한 파도 소리
최성원이 부르는 노래 ‘제주도 푸른 밤’은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몇 초 동안 파도 소리를 먼저 들려주는데, 혹 아시는지요? 손전화 벨소리에 노래를 담아 놓고, 누군가 내게 전화를 하면 저는 파도 소리로 그 사람을 만납니다. 핀잔을 주는 사람도 많았어요, 벌써 몇 년 동안 바꾸지도 않고 늘 그렇게 제주 타령이냐구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사람들이 제게 파도 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이번에 원없이 실컷 듣고 왔어요. 우도 서빈백사랑 하고수동에서, 표선 해수욕장에서, 함덕 해수욕장에서, 용두암에서, 그리고 모슬포에서, 서귀포에서 내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