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핵해방구 부안 "촛불에서 영화로"

[부안영화제①] 문화자치 꿈꾸는 부안...'꿈의 공장' 세울 터

등록 2004.08.14 17:34수정 2004.08.1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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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4 부안영화제 개막식 현장. 부안 주민들은 하루빨리 핵폐기장 문제가 해결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2004 부안영화제 개막식 현장. 부안 주민들은 하루빨리 핵폐기장 문제가 해결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태형


a 환경, 생태, 생명, 자치의 빛소리. 이번 영화제를 통해 부안은 '문화 자치'의 씨앗을 심었다.

환경, 생태, 생명, 자치의 빛소리. 이번 영화제를 통해 부안은 '문화 자치'의 씨앗을 심었다. ⓒ 오마이뉴스 김태형


핵 없는 세계를 꿈꾸는 '반핵 해방구' 부안의 여름은 요즘 영화제로 뜨겁다. 지난 12일부터 2박3일간 부안 반핵민주광장 일대에서 열리고 있는 '2004 부안영화제, 생명문화를 보다'가 무더운 갯바람 더위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80년 광주와도 같았다던 지난 1년 동안의 '핵폐기물처리장 유치 반대 투쟁'이 광장 한 켠에 마련된 스크린에 투사된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그 싸움을 온몸으로 기억하는 부안군민들이 다시 옷장 속에 묵혀 뒀던 노란색 티셔츠를 꺼내 입고 반핵민주광장 앞으로 모였다.


풀뿌리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썼던 장삼이사 주인공들이 이제는 시골 작은 마을의 관객이 되어 '부안 시네마 천국'을 만들어 냈다. 영화 한편 보기 위해 정읍이나 전주까지 나가야 했다는 부안에서 이렇게 번듯한 영화제까지 열 수 있었던 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핵폐기장 투쟁 과정에서 얻은 성과 덕분. 광장에 모인 주민들은 '촛불이 영화로 되돌아왔다'며 연신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부안은 경제·정치 자치를 넘어 문화 자치까지 꿈꾼다. 영화관에 모인 주민들은 지난 촛불집회에서 키운 자발적 참여의식이 부안만의 독특한 '생명문화'를 싹트게 했다고 당당히 얘기한다. 이번 영화제 기치로 건 '환경', '생태', '생명', '자치'는 부안의 긍지이자 미래지향점을 나타낸다. 부안은 이제 반핵을 넘어 생명을 이야기한다.

a 부안영화제가 진행되고 있는 부안동초등학교 전경. 이번 영화제에는 환경, 인권, 여성 문제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20여 편이 상영됐다.

부안영화제가 진행되고 있는 부안동초등학교 전경. 이번 영화제에는 환경, 인권, 여성 문제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20여 편이 상영됐다. ⓒ 오마이뉴스 김태형


a 부안영화제 상영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안동초등학교 강당. 사진 속 작품은 여성 철도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하는 박정숙 감독의 <소금>

부안영화제 상영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안동초등학교 강당. 사진 속 작품은 여성 철도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하는 박정숙 감독의 <소금> ⓒ 오마이뉴스 김태형


촛불이 영화로 돌아왔다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부안동초등학교 강당과 반핵민주광장 주위에는 부안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온 600여명이 연 이틀째 영화 관람과 문화행사 등을 자유롭게 즐기고 있다. 무더운 날씨 탓에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 관심 있게 봤던 영화 얘기나 부안과의 인연을 나누는 모습이다.

지난해 온 부안을 노란 물결로 만들었던 반핵 티셔츠 모자와 함께 이번 영화제를 위해 특별 제작한 티셔츠를 입은 주민을 부안 읍내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황톳물로 천연염색을 했다는 영화 티셔츠는 준비해온 500벌이 하루 만에 동날만큼 인기가 좋다.


방학을 맞은 인근 중고등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멀리 평택 등에서 온 학생 30여명이 자원봉사로 영화제 진행을 돕고 있다. 저녁 8시에는 상영 장소를 동초등학교 강당에서 반핵민주광장으로 옮겨 본격적인 문화공연과 함께 영화 축제 한 마당을 펼쳐 나간다.

12일 밤 8시 반핵민주광장에서 열린 개막식은 그 자체로 또 한 편의 영화였다. 개회사에 나선 범부안핵반대대책위 공동대표 김인경 원불교 교무는 "그동안의 투쟁성과를 바탕으로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이렇듯 위대한 축제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며 "이번 영화제를 통해 부안의 문화적 역량을 만천하에 알리고 새로운 공동체의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하자"고 영화제 취지를 밝혔다.


a 부안 반핵민주광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부안 주민들.

부안 반핵민주광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부안 주민들. ⓒ 오마이뉴스 김태형


핵폐기장 투쟁 과정을 다룬 개막작이 상영되자 광장에 나왔던 주민들 얼굴에는 금세 엷은 한숨과 함께 알듯 모를듯 씁쓸한 표정이 교차했다. 붉게 충혈된 눈가에 흐르는 눈물과 땀을 닦아내는 모습도 여기저기서 보였다.

'아이고, 저걸 어째'라는 한탄이 나올 법도 하지만 광장은 상영 내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바로 나와 내 이웃이 영화 주인공이었기에 안타까움마저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눈 앞 대형 스크린 속에는 피 흘리는 어머니와 울부짖는 아이의 모습이 가득 펼쳐졌다.

그 당시 입었던 부상으로 얼굴 왼편에 굵은 흉터를 갖게 된 한 주민은 자신이 나오는 장면에서 결국 고개를 돌리고 담배 한 대를 피운다. 이날 광장에는 당시 입은 부상으로 지금까지 부안성모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 주민들도 환자복을 입은 채로 나왔다.

영화 상영이 끝난 10시 이후에 몇몇 주민들은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당시를 떠올리며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200회 이상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김갑철(47)씨는 "아직도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예상보다 주민이 적게 온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참 사람이 모였을 때는 부안버스터미널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다"며 당시를 떠올리던 김씨는 "청와대와 정부에 대한 부안군민들의 불신은 날로 커져만 가고 있다"며 "정부가 하루빨리 부안 핵폐기장 유치 백지화를 선언해야 부안군민 모두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a 부안영화제 중간중간에는 즉석에서 관객들과 토론회가 진행되기도 했다.

부안영화제 중간중간에는 즉석에서 관객들과 토론회가 진행되기도 했다. ⓒ 오마이뉴스 김태형


부안, 대안 운동의 메카로 새롭게 태어나다

부안 영화제 상영작

<유산 - 한 어부의 이야기>, 피터 헤저더스 감독(생태·환경)
<소금>, 박정숙 감독(여성)
<음식물쓰레기가 없는 세상, 지렁이가 돕는다>, 황윤 감독(생태·환경)
<시민태양발전소, 발전을 시작하다!>, 황윤 감독(에너지)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오종환 감독(생태·환경)
<퍼블릭엑세스 교육>, 김화선 외 6명(자치 등)
<이것이 민주주의다>, 빅노이즈 필름(정치)
<이중의 적>, 이지영 감독(비정규직)
<끝나지 않은 전쟁>, 민중의 소리(반전·평화)
<반전의 목소리들>, 진보네트워크(반전·평화)
<노란 카메라>, 한범승 감독(자치·미디어)
<우리 산이야>, 김성환 감독(생태·환경)
<부안, 주민의 권리를 찾는다>, 참소리(자치·환경)
<미디어 교육, 주민공모작>(자치·미디어)
<히바큐사 - 세상의 끝에서>, 카마나카 히토미 감독(생태·환경)
<버스를 타자>, 박종필 감독 (장애인)
<동강은 흐름다>, 김성환 감독 (생태·환경)
<엄마 ···>, 류미례 감독(여성)
<정거장>, 장미경 감독(여성)
<새만금, 핵폐기장 낳다>, 이강길 감독(생태·환경)
20여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는 '2004 부안영화제'에서 특징적인 것은 부안이 핵폐기장 문제를 넘어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라크 파병, 여성 노동자 문제 등 다양한 사회 현안에 대한 문제의식의 확산 역시 주목할 만한 점이다.

핵폐기장 투쟁 과정에서 주류언론의 문제와 한계를 뼈저리게 깨달았던 주민들과 영상활동가들이 직접 나서 새로운 '매체 문화'를 창조했다는 점 역시 평가받을 부분이다. 이번 영화제가 열리기 2달 전부터 영화조직위 등에서는 '카메라를 든 부안 주민'이라는 주민대상 미디어교육 강좌를 열어 '영상을 통한 참여 민주주의' 실험을 펼치기도 했다. 부안에서는 주민들이 직접 카메라와 펜을 들고 스스로를 담아내는 '시민감독'과 '시민기자'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새만금 갯벌을 지키기 위해 작년 3월 28일부터 65일간 진행된 309km 삼보일배 대장정을 다룬 오종환 감독의 <길 위에서 길을 묻다>, 5년 간 부안 현지에서 새만금간척사업 진행과 핵폐기장 문제를 지켜봐 온 이강길 감독의 <새만금, 핵폐기장을 낳다> 등은 부안이 앞으로 떠안고 가야할 새만금 문제의 고민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대안 에너지의 가능성을 모색한 황윤 감독의 <시민태양발전소, 발전을 시작하다>, 최소한의 모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여성 철도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한 박정숙 감독의 <소금>, 미디어 참세상 영상팀이 연출한 <반전의 목소리> 등은 부안이 이제 반핵을 넘어 여성·인권·반전 등의 문제를 고민하는 대안 운동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14일 격포항에서 진행되는 부안영화제 폐막식에서는 바다와 함께, 바다를 향해 살아온 부안의 꿈을 담은 한판 축제가 펼쳐진다. 부안이 좋아 이곳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 땅이 추구해야할 가치를 고민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생명'을 외치는 곳. 부안은 지금 연기 없는 '꿈의 공장'을 짓고 있다.

[영화제 이모저모] 폭도가 영화를?
사진전 등 문화행사 참여 열기 높아

ⓒ오마이뉴스 김태형

부안영화제가 열리는 반핵민주광장 주위에는 핵폐기장 투쟁 과정을 담은 사진전이 열렸다. 영화를 보기 위해 광장을 찾은 주민들은 수백 장들의 사진을 꼼꼼히 살펴보며 자신이나 이웃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당시 '예비 아빠'였던 한 남성은 백일이 갓 지난 아이를 없고 사진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이 아이를 못 보는 줄 알았다"며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떠올리던 그는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도 이번 싸움의 진실을 알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담아두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광장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저녁 8시30분 전에는 통기타나 '노래방 반주'에 맞춰 즉석에서 문화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무대에 오른 김인경 범부안핵반대대책위 공동대표(원불교 교무)는 "집행부에서 가수 주현미를 섭외하기로 했는데 잘 안된 것 같아 내가 주현미 노래를 부르도록 하겠다"며 노래 '짝사랑'을 열창, 주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기도 했다.

영화제가 열리는 무대 앞에는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다루는 최병수 작가의 얼음 설치미술 '펭귄이 녹고 있다'가 전시됐는데, 무더운 날씨 탓이기도 했지만 순식간에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는 바람에 펭귄이 훨씬 일찍 녹아버리는 '비극'이 연출되기도 했다.

청와대 앞에서 40일 넘게 단식을 벌이고 있는 지율스님을 돕고 있는 '도롱뇽 친구'들도 광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천성산 문제에 대한 부안 주민들의 관심과 지지를 호소하는 활동을 벌였다. 직접 제작한 도롱뇽 책갈피와 왕관 등을 나눠준 도롱뇽 친구들은 "부안과 천성산 문제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함께 풀어가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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