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야, 너도 사느라고 욕본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21) 아버지의 목소리

등록 2004.08.14 19:48수정 2004.08.1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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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날의 어버지
젊은날의 어버지박도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은공을 안다”고 한다. 말이나 글로 수백 번 이야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나도 그랬으니 다른 이를 탓할 수는 없다.


지난 학기를 끝으로 교단생활을 접고 서울 집에는 딸 아들을 남겨둔 채, 아내와 함께 안흥으로 내려와서 단둘이 지내고 있다.

옛날 같으면 이미 모두 자식들을 모두 여의었을 나이지만, 나는 결혼이 늦어서 자식을 늦게 둔 데다가 여태 맏이인 딸아이는 공부를 하고 있다. 둘째 녀석(아들)은 지난해 졸업하여 직장에 나가고 있다.

미혼인 아이들 때문에 시골 행을 많이 망설였는데 나보다 아내가 더 빨리 결단을 내렸다. 아내는 서양에서는 “18세만 되면 자식들을 자립시키는데 언제까지 아이들을 주리끼고 살 수는 없다”는 것과 “요즘 아이들은 언제 결혼할지도 모른데 무작정 기다릴 수 없다”면서 남매끼리 잘 꾸려 살 테니 걱정 말라면서 시골 행을 채근했다.

한편 생각하니까 나는 고교시절부터 서울에서 혼자 살기도, 여동생과 함께 자취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부모가 곁에서 온갖 시중들어주는 게 오히려 자식들의 빠른 자립을 방해하는 요인도 될 것 같아서 내 생각을 접었다.

시골에 내려온 후 문득문득 아이들이 떠오를 때마다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 때때로 수화기를 들고, “별 일 없느냐?”고 묻곤 한다. 주말이면 그들을 기다려 보지만 뭔 일이 그리도 바쁜지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다녀간다.


간밤 아내 말이 이번 주말에는 아이들이 온다고 하여, 오늘 아침에 전화를 하였더니 오후에 내려오겠다고 했다. 가능하면 누나랑 같이 내려오라고 일렀다. 오늘따라 마음이 뒤숭숭한 게 글이 통 써지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이들이 오면 주고자 텃밭에 가서 옥수수를 땄다.

아이를 위하여 텃밭에서 마련한 옥수수와 고구마
아이를 위하여 텃밭에서 마련한 옥수수와 고구마박도
아내가 기왕이면 고구마도 몇 알 캐서 맛을 보이자고 해서 아직은 이르지만 고구마 순을 헤치고 호미로 두둑을 후볐다.


그런데 갑자기 왜 눈물이 쏟아질까? 그것은 내 부모님에게 불효한 회한의 눈물이다.

곰곰 생각할수록 나는 불효자였다. 학교 다닐 때는 그런대로 자주 다녔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한 뒤로는 부산에 사셨던 아버지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이면 차표를 사지 못했다는 핑계로 자주 찾지 못했다.

어쩌다가 내가 집에 내려가면 아버지는 아들을 잡고 온갖 얘기를 다하셨다. 그때마다 여러 번 들은 얘기이고, 따분한 얘기인지라 피곤하다는 핑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버지는 모처럼 내려온 아들에게 자랑삼아 당신이 살아온 얘기를 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거래처에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당신은 헌 신문으로 배 봉지를 만들고, 고물상에서 주워온 자투리 종이로 꼬리표도 만들고 살지만, 그래도 내 아들은 서울서 대학을 다니고, 학교 선생님이라고, 거래처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그동안 그들에게 무시당했던 스트레스도 조금은 풀고 싶었던 마음도 있으셨던 것 같았다.

그런데 아들은 자주 내려오지도 않고, 내려온 데도 아비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으니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그렇게 다정다감하고 말씀 잘 하시던 아버지였건만 큰집(교도소)을 다녀오신 뒤부터는 통 말씀이 없었다. 드문드문 하신 말씀을 연결해 보면 수사관들이 어떻게나 잠을 안 재우고 고문을 하는지 “그놈들이 지쳐서 잘 때, 시뻘건 난로를 뒤집어쓰고 죽고 싶었다” “내가 죄닦음을 했다”는 등의 말씀이었다. 그 이후로 거의 말문을 닫다시피 하시고는 붓을 잡았다.

아버지가 그렸던 그림은 ‘설중마부(雪中馬夫)’요 ‘대춘록보(待春鹿譜)’, ‘달마상(達磨像)’이었다. 눈보라를 헤치고 말을 모는 마부를 당신이라고, 눈 속에 사슴이 봄을 기다리는 그림에서는 사슴을 당신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눈은 '현실'이요, 봄은 '조국통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 그림에 찬사를 보내면서 아버지를 위로하기는커녕 모난 당신의 삶을 원망했다.

이런저런 지난 일들을 곰삭히고 있는데, 아내가 텃밭으로 나와서 아직은 고구마를 캐기가 이르니 아이들이 잘 먹으면, 그때 더 캐주자고 일렀다. 듣고보니 아직은 씨알이 작았다.

아내는 막 딴 옥수수의 껍질을 벗기고 고구마를 닦아서 아이들이 오면 바로 쪄줄 수 있게 솥에다가 앉혔다. 슬그머니 나는 글방으로 돌아와 이 글을 자판에 두드리면서 온통 귀를 길가 자동차 소리에 쏟고 있다.

“애비야, 너도 사느라고 욕 본다.” 멀리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이 글을 막 마무리하는데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저 지금 내려가는 중이예요." "그래! 조심해라."

또 한번 눈물이 글썽거려진다. "그래, 너희는 애비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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