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4.08.16 17:53

수정 2004.08.16 19:49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카인의 표지' 를 달고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몸 어딘가에 붉게 찍혀져 있는 운명의 낙인을 거부하지 못하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책이 박영택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니 나의 대학시절이 떠오른다. 대학시절, 잠자는 시간도 아깝게 느껴졌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대학시절은 내 인생 최고의 각성기였다. 우리과 친구들은 아주 똑똑하고 당차보였고, 특히 우리를 모아놓고 대학이야기를 해주는 선배들의 정신세계는 오를 수 없는 바벨탑 같이 높아 보였다.

선배들은 장난삼아 '하느님과 선배는 동기다'라거나 '선배는 하늘이다'라고 말했지만 난 그 말을 정말 금과옥조처럼 내 마음에 새겨둘 정도로 선배들에게 압도되었으며, 동시에 매료된 상태였다. 친구들과 선배들은 나를 자극하고 긴장시켰으며 끝도 없이 내 정신과 의식의 고양을 부추겼다.

한 친구가 자신이 읽은 책제목만 슬쩍 흘려도 난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대출하여 날이 어두워지는 줄 모르고 읽어댔으며, 선배가 한 이야기는 심지어 농담도 귀담아 들으려고 노력했다. 친구들과 선배들의 경험담은 교수님들의 강의와 추천도서목록보다 더 중요한 삶의 레시피였다. 그러면서도 더 치열하지 못한 정신과 부족한 열정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던 시절이 대학시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조금씩 느슨해지고 시들해졌다. 나날의 생활은 항상 똑같았으며, 가끔씩 그 생활이 지루해지면 술을 마시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모양이어서 가끔씩 그 미적지근함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불륜의 사랑에 슬쩍 발을 대보기도 하고, 술을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뜨거운 삶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은 '죽음'이라는 방식 외에는 '모든 떠남은 장난이며 연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가방을 꾸려 길을 나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러한 미적지근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한 바가지의 얼음물을 끼얹어 준다. 난 너무나 갑작스런 충격에 이것이 뜨거움인지 차가움인지조차 모르고 얼얼해져 그만 한동안 멍해있었다.

내가 살면서 조금씩 잃어버렸던 우리들의 열정과 순수함을 조용히 복원시키고 재생시켜준 책이 바로 박영택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예술가의 정신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직접 그를 찾아갔을 박영택도 그들의 방에서 자꾸만 나약하게 현실과 타협하고 사는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고 고백하고 있다.

예술가는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잠들어 있고 눈감고 있어도 홀로 두 눈 부릅뜨고 깨어 있는 사람, 그래서 그들의 깨어 있음이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각성과 고양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이끄는 역할을 하는 사람, 그로 하여 다른 사람보다 필연적으로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예술가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