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오마이뉴스>를 스폰서로 하면 안 되나요?"

[오클랜드 하늘에 뜨는 무지개 24] 딸아이의 난처한 부탁에 답하며

등록 2004.08.17 10:20수정 2004.08.1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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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쯤, 매주 주말 저녁마다 열리는 가족회의에서 딸아이 동윤이가 제게 특별한 부탁을 해왔습니다.


"아빠, <오마이뉴스>를 스폰서로 하면 안 되나요?"

딸아이 말인즉슨, 아빠의 직장(?)이 <오마이뉴스>이니, 이번 10월에 자신의 학교에서 다녀올 야외 캠프를 위하여 <오마이뉴스>가 협찬금을 내도록 말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은 어이가 없었지만 동윤이의 부탁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동윤이에게 아빠의 직장은 <오마이뉴스>라고 늘 말해왔으니 말입니다. 출근은 안 해도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로서 꾸준히 글을 써오고 있으니, <오마이뉴스>가 내 직장이라는 말은 나로서는 조금도 거짓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시민기자에 대해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동윤이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내가 <오마이뉴스>의 정규 직원이 된 줄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빠의 직장인 <오마이뉴스>가 자기 학교의 야외캠프 행사에 스폰서가 되도록 말을 해달라고 내게 부탁한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잘 이야기를 했더니 그제야 이해를 하면서도 조금 실망하는 눈치입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도 "아빠가 회사에서 몇 번째로 높은 사람이야?"라고 자주 물어보곤 했으니, 실망할 만도 하겠다 싶더군요.


들어주기 난처한 이런 부탁을 동윤이가 내게 하게 된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오는 10월 말에 동윤이의 반을 비롯해서 모두 4개 반 학생들이 4박 5일간의 야외 캠프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뉴질랜드 북섬의 가운데에 있는 통가리로 국립공원에서 암벽타기, 카누타기, 동굴탐사, 정상등반 등의 야외 활동을 통하여 대자연 속에서 도전 정신을 키우는 것이 이 야외 캠프의 주된 목적입니다.


'어드벤처 챌린지(Adventure Challenge)'라고 이름붙인 이 야외 캠프의 추진을 위해 학교에서는 지난 4월 말부터 준비를 해왔지요. 학생 1인당 400달러(약 30만 원)라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다보니, 학부모들의 동의를 얻기 위하여 학부모들을 불러서 설명회도 개최하고 찬성여부를 묻는 가정통신문도 돌렸습니다. 다행히 찬성 의사를 밝힌 학부모들의 숫자가 시행 가결선인 70%를 훨씬 넘어서, 야외 캠프는 계획대로 추진되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또한 학생들에게 동기 부여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하여, 야외 캠프에 소요되는 경비의 반은 학생들이 직접 나서서 마련하게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좋은 공부가 될 테니까요.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야외 캠프 비용의 절반을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어드벤처 챌린지'의 제1관문이 되었습니다.

실질적인 재원 조달 활동은 야외 캠프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과 일정이 다 마무리되고 난 다음인 7월 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동윤이의 반에서는 8명씩 한 그룹이 되어 여기저기 협찬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그 중에서 관심을 보이는 곳이 있으면 직접 가서 사람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끔씩 동윤이에게 물어 확인한 진행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2000달러를 모은 반도 있다고 하는데, 자기네 반에서는 아직 200달러도 채 모으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동윤이가 속해 있는 그룹의 학생들은 자기 부모님들에게 부탁해서 부모님들이 다니는 직장에서 협찬을 받는 것을 생각해낸 모양입니다.

그래서 같은 그룹에 있는 단짝친구 테라이는 우체국에 다니는 자신의 아빠에게 부탁을 했고, 동윤이는 아빠의 직장이라고 여긴 <오마이뉴스>에 스폰서를 해달라고 하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온 것입니다. 아빠가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딸아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빠에게 기대했던 것이 무산되자, 동윤이는 몹시 애가 타는 듯했습니다. 재원 조달 활동은 8월 말까지 끝내기로 되어 있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데, 자기 그룹에서 모은 돈은 거의 없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마침내 모금함을 들고 집 근처 쇼핑센터 안에 있는 상점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모금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a 쇼핑센터에서 모금을 마치고 흡족해하는 동윤이와 테라이

쇼핑센터에서 모금을 마치고 흡족해하는 동윤이와 테라이 ⓒ 정철용

학교를 마치고 난 지난 수요일 오후, 동윤이는 같은 그룹의 친구들 3명과 함께 보타니 타운 센터의 매장들을 2시간 동안 돌아다니면서 모금 활동을 벌였습니다. 저녁 5시 30분경에 동윤이를 데리러 갔더니 얼굴이 활짝 피었더군요. 모금함이 제법 무겁고 20달러짜리 지폐도 한 장 보이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돈을 모은 모양입니다.

집에 와서 세어 보니 모두 92달러 60센트. 게다가 한 귀금속점에서는 105달러에 상당하는 진주목걸이와 진주귀걸이 한 쌍을 현물로 받았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인심도 좋군'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나는 동윤이에게 웃어주었지요.

그러나 아직은 많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지난 일요일 동윤이는 단짝친구 테라이와 함께 다시 모금함을 들고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학교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쇼핑센터의 매장들을 돌아다니면서 모금 활동을 벌였습니다.

2시간 30분이 지나고 난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가보았더니 제법 모금함이 무겁습니다. 그런데도 두 아이들은 더 욕심이 나는지 30분만 더 하고 가자고 조릅니다. 그래서 그 30분 동안 멀찌감치 뒤에서 아이들을 따라가면서 유심히 살펴보았지요.

모금함을 들고 나서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도움을 청하는 아이들이나 지갑을 열어 돈을 모금함에 넣어주는 어른들 모두 입가에 미소를 띠었습니다. 거절하는 사람들조차도 무뚝뚝하거나 인상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더군요.

한 커피숍에서는 아이들에게 돈과 함께 핫초코 한 컵씩을 주기도 하더군요. 정말 보기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결코 비굴하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었고, 어른들 역시 결코 동정심에서 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a 한 청년이 오클랜드 시내 중심가 거리에서 전자오르간을 연주하며 모금을 벌이고 있다

한 청년이 오클랜드 시내 중심가 거리에서 전자오르간을 연주하며 모금을 벌이고 있다 ⓒ 정철용

이곳 뉴질랜드에서는 거리에서 멀쩡하게 생긴 청소년들이 기타나 전자오르간 등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거리로 나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건전한 기부문화 때문이 아닌가 하고 여겨지더군요.

집에 와서 모두 헤아려보니 모금함에 모인 돈은 모두 111달러. 5달러짜리 지폐도 몇 장 있었지만 거의가 동전들이었습니다. 고액권의 지폐는 한 장도 없었지만, 동전들에 담긴 작은 마음들이 오히려 더 좋아 보이더군요. 묵직한 무게로 모금함에 모아진 그 마음들이 너무나 정겨웠습니다.

여기에 10달러짜리 상품권 1장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만하면 됐다 싶은데 동윤이는 아직도 멀었다면서, 돌아오는 이번 주말에는 어떻게 돈을 모을 것인지를 궁리하는 모양입니다.

a 동전들에 담긴 작은 마음들이 고액권 지폐보다 오히려 더 묵직하다.

동전들에 담긴 작은 마음들이 고액권 지폐보다 오히려 더 묵직하다. ⓒ 정철용

딸아이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빠인 내가 그냥 팔짱만 끼고 있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이번 일을 기사로 써서 생기는 원고료에 그만큼의 돈을 더 얹어서 딸아이의 모금함에 넣어 주는 방법이었지요.

그 돈의 액수는 비록 크지 않겠지만, 그렇게 하면 <오마이뉴스>를 스폰서로 만들어달라는 딸아이의 난처한 부탁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지 않을까요? 동윤이가 아빠의 이 대답을 흔쾌히 받아 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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