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과 멍석 깔고 차 한잔에 취하다

[인터뷰] 정문헌 한나라당 의원의 '다도(茶道)' 정치

등록 2004.08.17 16:06수정 2004.08.1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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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실을 멍석과 물항아리, 천부경 병풍, 솟대 등의 '이색' 소품들로 꾸민 정문헌 한나라당 의원.
의원실을 멍석과 물항아리, 천부경 병풍, 솟대 등의 '이색' 소품들로 꾸민 정문헌 한나라당 의원.오마이뉴스 이종호


"국회에 큰 일정 없으면 의원회관 돌며 의원, 보좌관들 만날 것."

멍석 깔리고 차 향기 퍼지는 정문헌 한나라당 의원실을 방문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7대 국회는 하한기가 따로 없다 할 정도로 현안들이 줄을 잇고, 여야 공방이 치열하지만 그래도 잠시 국회 기자실이 한가할 때가 있다.

정치팀장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소위 의원회관 '마와리'(순례)를 하라고 지시한다. 의원회관을 돌며 의원, 보좌관들을 만나 정보와 기사거리를 얻으라는 것. 인간체온에 육박하던 무더위가 한창일 때 찾아간 정문헌 의원실은 바닥에 깔린 멍석과 물항아리, 천부경 병풍, 솟대 등의 '이색' 소품들로 여느 시골집 사랑방의 서늘함을 전해줬다.

정문헌 의원실은 두 종류의 손님 접대실이 있다. 소파·테이블이 있는 한켠에 멍석과 다기상이 놓여져 있는데 별실을 따로 둔 모양새다.

"보좌관들이 말렸는데 내 생활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싶어 남 눈치 안보로 했지요. 이 멍석은 지인들과 함께 지리산에 갔다가 얻은 것인데 관리랄 것도 없어요. 약만 일년에 두어 번 쳐주면 벌레도 안 생기고 시원하고."

소파에 앉으려는 의원에게 "녹차 한잔 주세요"라고 말해 굳이 신발 벗고 멍석 위에 자리를 틀었다. 의원의 차 내는 실력은 능수능란했다. 항아리에서 물을 떠 주전자에 담아 끓이고, 이를 다관에서 식힌 후 차잎을 우려내 다시 식혀 찻잔마다 따라 대접하는 복잡한 다도의 절차가 예사로워 보였다.

항아리는 국회의원이 당선되고 선물받은 것이라고 한다. 정치가는 늘 스스로를 정화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정 의원은 "우리네 뚝배기는 꼭 정수기"라며 물을 떠 다시 주전자에 담는다.


또 한쪽에는 1993년 부여에서 발굴돼 세상을 떠들섞하게 했던 '백제금동대향로'가 보였다. 물론 모사품이다. 의원은 "차와 향은 같이 간다"며 백제대향로에 숨은 이런저런 역사들을 소개하며 "향이나 한번 피워볼까? 에이 오늘은 놀자"하며 긴장을 놓는다. 그러면서 백제대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은 "주변의 기후와 습도에 따라 연기 올라오는 모양이 다르다"며 감탄을 늘어놓는다.

"차와 향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의 일상문화였어요. 지금 아로마세라피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이미 했던 것인데, 언제부터인가 수입되기 시작하더니 서양의 것으로 착각하더라구요. 아랍의 귀족들이 쓰는 베트남 침향목을 최고로 치는데, 우리는 매향목이라고 수백년된 향나무나 소나무를 서해안 뻘이나 동해안 백사장에 묻어 화석화시킨 게 있어요. 매향목 묻은 자리엔 비석을 세웠다고 하는데 전쟁통에 다 사라졌죠. 아직도 보물찾기하듯 그걸 찾아다니는 분들이 있어요."

차는 맑음을 추구...정치도 그와 같아야


오마이뉴스 이종호
다도를 언제부터 시작했냐는 질문에 정 의원은 '다도'가 아니라 '다례'라고 교정해 준다. 일본이 다도(茶道)이고 중국은 기예를 강조한 다례(茶藝), 우리는 예절을 강조한 다례(茶禮)라며 기술이 발달한 중국, 경직된 일본에 비해 우리의 차 문화는 절제된 기본 예를 바탕으로 편안함이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차와 향, 여기에 더해 명상이 정문헌식 놀이의 삼요체. 그는 차와 명상을 하는 이유를 묻자, "그냥 놀이문화라고 생각해요, 20대에도 할 수 있지만 70살이 되어서도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 아닌가요"라고 간단히 답한다. 그런데 요즘, 정확히 말해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부터 명상을 하기가 힘들어졌다고 쓴웃음을 짓는다.

"명상이 좀 되는 날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게 돼요. 나에게 가해를 행하는 사람도 너그럽게 대하게 되고. 그런데 요즘엔 잘 안돼. 판이 이래서인가..."

명상이라고 뭐 대단할 없다는 것이 정 의원의 명상법. 그는 "정신통일하겠다고 집착하는 것 자체가 잡념"이라며 "고민이 있으면 고민을 하고, 그냥 편안한 자세에서 하고 싶은 생각을 하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조금이 생각이 옅어지고 맑아진다며. 그는 명상을 "나를 바라보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그러다 보면 나와 남의 구분이 사라진단다.

정치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의 답변은 소탈하고 담백했다.

- 박근혜 대표의 정책특보로 알고 있다.
"선거 좀 잘 치르라고 붙여준 타이틀 아니겠어요?(웃음). 남북관계와 주변국과의 외교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또한 정 의원은 8명의 원내부대표단에서 '의원지원'을 맡은 부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 전당대회 때 의원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했는데.
"아이고 창피해. 음악이랑 안 친해요. 학교 때 좀 놀았고 그 때 배운 것 정도인데..."(그러면서 북은 하늘을 울리고 징(심벌즈)은 땅을 깨우는 의미가 있다며 드러머의 매력을 설명했다)

- 웰빙문화 국회연구모임을 만들어 관련 법안도 준비중이라던데.
"웰빙이 뭐예요? 차 마시고 명상한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의 웰빙은 돈과 건강이 중심인데 저는 생각이 달라요."(일부 언론보도의 내용과 사실이 달랐다.)

- 호주제 찬성하나.
"폐지해야 돼요. 재혼시 자식의 성문제가 핵심인 것 같은데 저는 그보다 모계사회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예요. 신라도 그랬고 우리는 모계전통이 강한 나라입니다."

- 사형제는.
"당연히 폐지."

- 국가보안법은.
"폐지에는 반대예요. 외교관계가 남아 있으니 상징적인 수준에서 필요하다고 봐요."

정 의원의 대북관은 한나라당 내에서 보자면 '진보'에 속한다. '통일부 장관의 사전승인 없이도 인터넷을 통해 북한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을 골자로 한 남북교류협력법에 서명했고, 원희룡, 박형준, 권영세 의원 등과 더불어 남북교류협력 증진을 위한 여야 국회의원모임 회원이기도 하다.

그는 7·4남북공동성명. 6·15 남북정상회담 등의 의의를 평가하면서도 "이제는 대북정책이 개인의 치적으로 가서는 안된다"며 남북통일에 있어 가장 큰 장애는 민족이질감이라고 지적한다. 이어 "공통된 역사 없이 어떻게 이질감을 극복할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관련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의 심각성을 들어 "고구려가 날아가 버리면 백제, 신라의 존립근거도 없다, 그러면 공통의 역사는 사라지고 남북이 통일할 이유도 없어진다"고 말한다.

정치인은 유사시 가장 먼저 목숨을 내놓는 사람

오마이뉴스 이종호
정 의원은 정치학 교수 출신답지 않게 역사에 대한 식견과 관심이 높았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친구들 중에 재야사학자들이 많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의원은 이런저런 책과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역사바로세우기의 중요성을 설명했지만 그의 역사관은 의외로 간명하게 정리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홍익인간, 인내천 사상.

"우리는 인류를 이롭게 하자고 건국된 나라예요. 홍익인간에는 파시즘과 국수주의가 없어요. 우리 역사는 철학이고, 아주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그런 우리의 사상이 서구 물질문명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저는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들 막 대하잖아요. 조심해야 해요."

'냄비문화'에 대한 정 의원의 해석은 다르다. 그는 "적절한 시점에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고 쉽게 잊는 것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정치의 재료는 역사"라고 말한다. 정치학 이론을 검증할 때 역사를 통해서 하고, 이를 일반화, 이론화하는 것의 차이일 뿐, 정치의 교과서는 역사라는 것. 그런데 "우리 정치의 재료는 모두 서양의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폭탄주 아니 차가 몇 순배를 거듭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이 인터뷰는 한담처럼 오갔고, 시간은 두 시간을 훌쩍 넘어 버렸다. 정 의원은 초의선사 말을 인용 "차는 홀로 마시면 신령스럽고 둘이 마시는 게 으뜸"이라며 "이계진 의원은 자주 놀러와요, 너무 좋아하신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 일과 관계된 방문객이 많아 만남은 6인용 소파 위에서 이뤄진다.

- 차 생활을 통해 일상의 어떤 도움을 받나.
"차는 맑음을 추구합니다. 그게 일상과 접목이 되지요.

- 가장 혼탁한 게 정치인데.
"정치가 맑아져야겠지요."

- 국회의원들의 특권은 뭐라고 보나.
"막상 들어오니 특권이 있나 싶어요(웃음). 유사이래로 평상시 정치지도자를 대접한 이유는 사안이 발생하면 제일 먼저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없으니 폐지하자는 말이 나오는 거고…."

- 요즘 정치권에 역사바로세우기 목소리가 높은데.
"우리의 사관은 일제잔재와 무작정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변질되었어요.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정체성을 찾아 발전된 방향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그의 정체성이 궁금했다. 명쾌하게 답한다.

"나는 보수예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게 대한민국 보수입니다. 보수가 뭡니까? 전통을 보존해서 지키자는 것 아닌가요. 그게 대한민국 보수의 백미입니다."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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