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수능 방송'이 성공 정책이라고?

[주장]세녹스가 유사 휘발유이듯 EBS 수능 방송은 유사 학교교육

등록 2004.08.24 08:10수정 2004.08.2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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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사교육비를 경감하겠다며 임시 방편 해열제라는 것을 전제로 시작한 'EBS 수능 방송'이 정부의 대표적인 정책 성공 사례로 꼽혔다.

지난 21일 '정책사례 분석 토론회'에서 국무조정실이 성공한 정책으로 EBS 수능 방송을, 실패한 정책으로 세녹스(유사 석유) 정책 등을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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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EBS 수능 방송'은 '공교육 정상화를 통한 사교육비 경감' 차원이 아니라, '사교육비 경감을 통한 공교육 정상화'라는 주객전도 슬로건을 내걸고 출발했다.

이 왜곡된 출발에 대하여 그래도 현실적 대안이라는 명분에 울며 겨자먹기식 동의를 한다쳐도, 시행 다섯 달도 안 된 데다가 수능시험 한 번 치르지 않고 정부의 대표적인 정책 성공 사례라고 말하는 것은 학교 현장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쌍방향 교사와 학생의 인간적 상호작용보다 모니터와 학생의 상호작용을 중시하여 교육의 본질조차 훼손하더니, 급기야 정책 성공 사례라고까지 못박아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교육 관료들만의 리그'요, 학교 현장에 대한 부관참시라고 할 수 있다.

만병 통치약도 아니고 종합 감기약도 아닌 땜질 해열 정책에 굳이 성공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보면 참여 정부의 교육 정책에 관한 평가 항목이 얼마나 부재 중인지 짐작이 간다.

하나의 교육 정책을 마무리하지도 아니하고 시행 과정에서 성공 정책이라고 못박아 말하는 것은 억지요, 강변이요, 자화자찬에 불과한 선동이다.


더구나 대통령 주재로 교육부총리와 고위 관료들이 대거 참석한 자리에서 이러한 평가를 내렸다고 하니 교육 주체를 무시한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행태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a 국가가 지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EBS 수능 방송인가, 공교육 정상화인가?

국가가 지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EBS 수능 방송인가, 공교육 정상화인가? ⓒ 박병춘

교육부 장관의 강력한 의지로 시행되고 있는 'EBS 수능 방송'은 교사, 학부모, 학생이라는 교육 주체가 평가해야 할 대상이다. 제대로 된 학교 현장 실사도 없이 시행 관료들이 나서 성공작이라고 말하는 것은 평가의 기본조차 망각한 처사이다.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설치한 임시 교량에 IT 산업을 조명 장치하여 휘황찬란한 세계 대역사인 양 호들갑을 떨어 공교육을 파행으로 몰아가는 행태가 과연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유사 휘발유 '세녹스'를 왜 실패작이라 말하는가. 휘발유가 아니라 유사 휘발유이기 때문 아니던가.

정부가 사교육비 경감 대책을 빌미로 EBS 수능 방송을 학교에 끌어들이고, 그것도 모자라 방송 내용을 수능 시험에 출제까지 한다니 이것이야말로 유사 휘발유에 버금가는 유사 학교 교육이 아니고 무엇이랴.

같은 휘발유지만 유사라는 이유로 불법인 것이 세녹스이다. 같은 교육이라 하더라도 학교 교육과 방송 교육은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 IT 강국 대한민국이라 하더라도 교사의 수업권을 정부 차원에서 통제하고 억압하는 처사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EBS 수능 방송을 학교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엄연히 공중파 상업 방송을 통해 이루어지는 시청자를 위한 서비스요, 한 방송사의 교육 기획물일 뿐이다. 채널 선택권은 교육 주체들에게 있다. 이를 학교에 끌어들여 고정 채널화 하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독재요, 실질적인 통제이다.

EBS는 사교육비가 없어 신음하는 서민들에게 다시 없는 교육 방송으로서 존재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안타깝다. EBS가 마치 대한민국 입시 대비용 방송국으로 전락하고 만다면 입시 대비 이외의 그토록 좋은 프로그램 또한 사장되고 말 것이다.

문화, 요리, 문학, 가족, 성, 영화, 토론,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교육 방송 프로그램은 우리의 사회 문화를 얼마든지 재생산하고 창조할 수 있는 힘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마저 EBS가 수능 공화국 내에 수능 방송국이라는 고정 관념에 휩싸여 간과되거나 외면되고 만다면 이것이야말로 국가적 낭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국무조정실은 세녹스 관련 평가를 놓고 정책적 고려가 미흡했던 정책 사례로 지적했다. 그런데 EBS 수능 방송은 성공한 정책 사례로 꼽아 놓았다. 세녹스라는 결과물을 놓고 장단을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EBS 수능 방송은 사교육비 경감 차원의 과정이고 진행 중인 정책이다. 그러니 김칫국부터 마신 격 아니겠는가.

이 나라 교육 주체는 누구인가. 학생, 학부모, 교사가 아니던가. 교육 주체의 명백한 동의도 없이 교육 관료들의 자의적 해석과 판단으로 한 나라의 교육 정책에 무분별한 성공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러한 평가가 국무조정실이라고 하는 국민의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니 참여 정부의 교육 정책 부재를 반증하는 것 아니고 무엇인가.

이 나라 희망인 청소년들마저 그러한 국무조정실 평가에 대해 냉소를 보내고 있다. 변장이라도 하여 학교 현장을 방문해 보라. 아니, 현장 조사는 왜곡될 우려가 있으므로 하교길 학생들에게 설문 조사라도 해 보라. 이 나라 교육부가 또 다른 학습 부담에 허덕여야 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불만에 진정으로 귀기울였는지 묻고 싶다.

EBS 수능 방송에 쏟는 열정을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쏟아 부어 달라. 이 나라 교육인적자원부가 백년지대계라는 책무를 짊어지고 제 기능을 회복하려면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범국민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부디 사교육비 경감을 통해 공교육 정상화를 도모하지 말고, 공교육 정상화를 통해 사교육비를 경감해 달라. 역리와 순리를 구별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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