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는 요녀가 아니라 휴머니스트"

홍석중의 <황진이>를 읽고

등록 2004.08.25 12:47수정 2004.08.2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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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훈서적

사실 처음엔 전경린의 황진이를 사려고 했다. 요 근래 전경린이 쓴 황진이가 큰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고, 여자가 쓴 황진이는 어떤 내용일까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경린의 황진이보다 먼저 홍석중의 황진이, 빨간 바탕에 화려한 꽃모양이 새겨져 있는 강렬한 책표지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북한 소설로는 최초로 국내 문학상 수상', 결정적으로 이 문구가 내게 이 책을 집어들게 했다. 북한 작가가 쓴 황진이, 홍명희의 손자가 쓴 황진이.


처음 두세 장을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이 무척 세련된 이야기 형식을 지니고 있을 것임을 직감했다. 작품은 '마방집'이라는 객줏집에 대한 묘사로 시작해, 다음 장에서는 곰보주인과 마을 사람들의 대화, 다음 장에서는 '놈이'의 내력 묘사 등으로 이어진다. 송도라는 한 지역의 풍경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다가 작가가 궁극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황진이와 놈이의 얘기로 조금씩 초점을 좁혀가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과정이 매우 자연스러워서 전체적으로 긴 옛날이야기 한 편을 듣는 것 같고, 단순히 시골 정경을 묘사한 것으로만 생각했던 장면들이 이후 장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 그 매끄러운 이야기 전개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러한 연결 과정에서 독자들은 황진이가 살았던 시절의 송도 풍경과 생활방식, 인심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맛볼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황진이가 황 진사댁 고명딸 노릇을 그만두고 기생의 인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인간적 배경을 생생히 실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황진이라는 존재에는 많은 이들이 붓을 들어 쓰고 싶게 만드는 화두가 들어 있을 것이다. 높은 사대부집의 고명딸에서 천한 기생으로의 전락, 숱한 양반들과의 염문, 여인이면서 지녔던 뛰어난 학문과 지성, 세간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는 파격적인 언행들.

수많은 화두 중 오늘날까지 황진이를 우리의 뇌리에 살아 있도록 만든 것은 아무래도 '인간미'가 아니었을까. 황진이가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서 일관되게 쫓았던 것은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은 인간대 인간의 만남, 넋과 넋의 만남이었다. 황진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양반들의 가식, 특히 신분과 성별이라는 차별매체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겉으로는 성인인 척하면서 뒤에서는 짐승보다도 더한 이기적인 행위를 하는 양반들의 이중적인 행태였다.


황진이는 양반댁 고명딸이었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몸종인 이금이를 돌보아주고 상직할멈 효덕과 끈끈한 정을 쌓아간다. 출생에 얽힌 비밀 때문에 기생의 길로 나아가게 되면서 커다란 심경의 변화를 겪기 이전부터 이미 신분과 성별의 차이에 초연한 기질을 천성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진이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 같은 관계를 맺었던 이금이, 효덕 할멈과 기생이 된 이후에도 평생을 함께 하며 돌봐주게 된다.

할멈과 이금이가 친구처럼 마주 앉아서 공기놀이를 하는 것이나, 이금이가 자신이 부리던 매질꾼 괴똥이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황진이가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화려한 상을 차리는 모습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아무리 반상이 뚜렷한 비인간적인 사회였다고는 하나, 조선도 인간이 모여 사는 곳이기에 양반과 종 사이에서도 인간대 인간으로서의 우정이 피어났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신분성별을 막론하고 존엄한 기운이 흐르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었던 황진이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며, 홍석중은 이 같은 '휴머니스트' 황진이의 면모를 유감없이 포착해내고 있다.

홍석중의 황진이를 통해서 우리는 황진이가 살았던 시대를 매개로 해, 그 이전의 역사와도 개연성 있게 만날 수 있다. 황진이의 어린 시절이 연산군이 쫓겨나던 해였으니 그 시절은 이미 고려가 망한 지 10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고려시절과 조선시절을 뚜렷이 구분하여 외우기만 했던 나로서는 이 시절을 묘사하는 데 자꾸만 고려시절 얘기가 나와서 처음엔 조금 이상했다. 조선이 건국한 지 한참 지났는데 왜 자꾸 고려 시절 얘기가 나오는 것일까.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이 작가의 시대를 꿰뚫어보는 방대한 시각에 감탄하게 되었다.

송도의 재력 있는 상인들이 고려 시대의 사대부 출신이라는 점, 고려 시대의 귀족층이 박해를 받아 결국은 장사치로 변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송도의 상인들은 조선의 양반들을 은근히 멸시하고 경멸한다는 점, 또한 이들이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시대 양반들에 대한 반감으로 지극한 불심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 등, 이 시대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말의 풍경이 등장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작가의 혜안과 박학다식함에 얼마나 감탄했던가.

이는 마치 조선왕조가 멸망한 지 백년이 다 되어가건만 아직도 우리 사회의 근저를 이루는 많은 윤리적, 관습적 체계가 조선시대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 그러므로 현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를 알아야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신분과 성별이라는 차별기제 아래에서 자신을 형상화해 간다. 지배층이었던 사또와 아전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날이 갈수록 이기적으로 추악해지는 반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인 화적패 두목 '놈이', 그 수하인 괴똥이, 기생 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자신의 신분적 정체성을 뛰어넘어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로 인격적 상승을 이루어간다.

언뜻 보기에 양반은 악, 천민은 선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보일 수도 있을 이러한 메커니즘을 작가는 인물의 입체적 형상화라는 작업을 통해 성공적으로 이루어낸다. 예를 들어 개성유수인 사또 희열은 책의 중후반까지만 해도 양반이긴 하지만 진이와 인간대 인간으로서 우정을 나누는 훌륭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다. 진이는 양반이긴 하지만 억지로 자신을 굴복시키려 하지 않고 운치 있는 우정을 나누는 희열에게 거의 사랑을 느낄 뻔한다.

그러나 이러한 희열도 자신의 관직과 미래의 출세가 달린 일이 닥치자 오로지 자신만의 영달을 위해 자신의 공모자인 이방과 관속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고 급기야는 진이를 이용해서 화적패 두목을 잡아들여 공을 세울 생각까지 한다. 자신의 권력과 출세지향이라는 명제 앞에서 너무나 쉽게 허물어져 버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인물 하나로도 우리는 반상이 뚜렷한 체제가 얼마나 인간이라는 존재를, 특히 양반신분에 있는 사람들을 못쓰게 만드는지 뚜렷이 볼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인물을 입체적으로 형상화시킴으로써 신분제의 비인간성을 간단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엔 많은 매력들이 은근히 깔려 있지만 무엇보다 나는 문학작품으로서 이 소설이 갖는 언어적 아름다움을 들고 싶다. 이 탄탄한 소설을 이루는 문장 하나하나는 거의 시와 같은 아름다운 울림을 가지고 있다.

…진이는 대답 대신 방그레 웃으며 효덕의 거친 손을 잡아 화끈 달아오른 자기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할멈은 대뜸 희색이 만면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번쩍였다.

사람의 정이란 이런 것이다. 그래서 옛 시인들은 사람의 정을 가리켜 순간이 만들어내는 꽃이요 세월이 무르익게 만드는 열매라고 읊었으리라…."


사람의 정이란 순간이 만들어내는 꽃.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비유인가. 작가의 언어 하나 하나로 인간사의 자잘한 생활상들이 하나의 시가 되어 아름답게 맺힌다.

이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황진이라는 대단한 여인의 불꽃같은 영혼을 화려하게 부각시켜서도, 엄하고 잔혹했던 신분체계에 맞서 황진이라는 뚝심 있는 여인이 행했던 양반에 대한 조롱을 통쾌하게 묘사하고 있어서도 아니다. 인간을 신분에 관계없이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고자 했던 한 아름다운 영혼이 신분과 성별이라는 차별 아래에서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끝까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특히 약자들에 대한 사랑을 강인하게 실천해 나가기 때문이다.

황진이는 강하고 비인간적이고 요염한 희대의 요녀가 아니라, 약하고 지극히 인간적이며 지적인 미를 지녔던 당대의 휴머니스트였던 것이다. 홍석중이라는 남성작가가, 그것도 북한의 작가가 이러한 황진이를 그려냈다는 것이 한없이 감탄스럽다. 언젠가 통일이 되어 그가 그려내는 현대사의 모습도 만나보고 싶다.

황진이 - 전2권

홍석중 지음,
대훈닷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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