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깔나는 문체가 그만인 홍석중의 황진이

등록 2005.01.24 23:03수정 2005.01.2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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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황진이>

<황진이>

서점에서 홍석중씨의 소설, ‘황진이’를 만난 것은 석달 전 일이다. 만해문학상을 탄 이북 작가 홍석중씨의 소설. 북한 소설을 그동안 읽어 본 적이 없던 나에게 황진이는 감동 이상의 무언가를 전해주었다. 만해문학상 선정이유에도 나왔듯, 이 글은 민중적 비속어와 품위 있는 시적표현이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동안 여타의 소설에서 건조한 현대어에 길들여져 2% 부족했던 나에게 홍석중씨의 글은 오아시스와 같았다. 1, 2권으로 이어진 이 책은 황진이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기생이 되는 과정에서의 심경변화와 맞물려 황진이와 황진이 집안의 종인 놈이와의 관계를 주되게 다루고 있다.


황진이의 심경은 중간 중간 서울 윤승지댁 정혼자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표현되는데 정혼 후부터 파혼, 기생이 되기까지의 심경변화는 아래와 같은 글로 표현이 된다.

"여보세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 안고 불쑥 소리쳐 찾았으나 당신을 어떻게 불렀으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얼굴이 붉어져요. 당황해집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짖궂은 장난군처럼 그냥 웃기만 하시는군요. 다정한 웃음이 저를 더욱 수집게 만듭니다."

"여보세요. 파혼을 했다고 벌써 저를 잊어버리고 계신 게 아닌가요? …작별인사를 나눕시다. 부디 행복하세요."

"안녕하세요? 깜짝 놀라시는군요. 옳아요. 제가 바로 5년 전 당신과 혼약을 맺었다가 파혼을 당한 진이입니다. 지금은 명월이라는 기명으로 불리우는 송도의 유명짜한 기생이구요.
…사랑이라구요? 원, 웃기지 마세요. 사랑이란 두억시니와 같은 것이예요. 말들은 많이 하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보세요. 바로 그런 '사랑'의 과정을 거쳐서 량반의 피줄과 종의 피줄이 한데 뒤섞인 진이가 이 세상에 생겨나지 않았나요. …눈물이 고입니다. 이 방에 혼자 앉아 있고 싶군요. 기쁨이라면 함께 나눌 수 있어도 슬픔이나 고통은 다른 사람과 같이 나누지 못하는 괴벽한 계집입니다. 자, 어서…"


기생이 되면서 자신을 괴벽한 계집이라 하면서 양반 댁 자제와 고위관료들을 자신의 치마폭에 휘둘리면서 황진이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런 황진이 앞에 황진이를 사랑하는 황진이의 기둥서방, 놈이가 있다.


기생이 될 것을 결심하고 황진이는 놈이에게 몸을 허락하고 놈이는 황진이의 기둥서방이 되지만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이 아닌 몸을 범했다는 괴로움에 놈이는 산속으로 들어가고 황진이는 냉담하고 사랑을 믿지 않는 계집으로 기방을 지키고 있다.

황진이가 기생으로 살면서 서경덕과의 에피소드도 나오지만 소설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대신 송도류수사또인 김희열이 등장하는데 그는 놈이를 살려달라고 힘들게 자신을 찾아온 황진이를 범하고 애초의 약속과는 달리 놈이를 효수에 처한다. 효수하기 전 날, 황진이는 마지막으로 놈이를 보러 형장에 찾아가 노래를 부르고 맑은 송화주 한잔을 건네는데, 송화주를 단숨에 들이 켠 놈이는 이렇게 말을 한다.


"아씨, 고맙습니다. … 저에게는 유한이 없습니다. 저는 더 바랄게 없습니다. 아씨가 저에게 주신 그 사랑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인연이 짧다구요? 분하구 아쉽죠. 하지만 꼭지가 무른 감이 가지에서 떨어지는 것이야 정한 리치가 아닌가요?

자신이 마구 되여먹은 탓이든 이 세상이 못돼먹은 탓이든 아씨와 저는 요행 사랑하고 사랑으로 받을 수는 있으되 그 이상은 어울릴 수 없는 짝입니다. 자기한테 차례지는 분복의 알맞춤한 정도를 스스루 알구 만족할 줄 알아얍죠. 사랑의 합환과 고별의 슬픔이 함께 담긴 잔이라…. 정말 좋은 말씀이올시다."


놈이를 뒤로 하고 형장을 나오면서 진이는 참형을 당할 놈이의 얼굴에 깃든 그 평온과 그 고요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놈이가 죽고 나서 김희열은 승진을 하여 의정부 우찬성으로 서울로 올라가고 황진이는 정처 없는 방랑길에 나서 소리를 하다 요절하게 된다.

"흔히 말하듯이 인간은 몇 해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추억 속에 얼마나 깊은 자욱을 남겼는가가 중요한 것이요, 그래서 죽음과 함께 비로소 삶이 시작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는 것이다. 권력과 세도를 휘두르던 폭군들의 웅장한 돌무덤은 흐르는 세월과 함께 무너지고 바사져 모래와 흙이 되였으나 길가에 앉은 진이의 나지막한 봉분은 40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오가는 길손들에게 애절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뉘라서 그의 짧은 한생을 불우한 것이라고만 이르랴.“

작가는 마지막 황진이의 길을 보면서 삶과 죽음을 넘어선 인물로 불우했지만 불우하지 않은 생을 살았다고 말을 한다. 사람들의 추억 속에 곱씹게 되는 사람, 40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모습 그대로 남은 사람, 파란만장한 생을 산 황진이를 그대로 기억하자고 한다. 그리고 황진이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자고 하면서 그는 백호 림제의 시조로 소설의 끝을 맺는다.

"청초 우거진 곳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을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어하노라."

황진이 - 전2권

홍석중 지음,
대훈닷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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